돈 좀 주세요

오형칠 | 2024.01.04 01:33
돈 좀 주세요


우리교회에 동혜실이 있다. 은퇴한 장로님들 쉼터다. 오전 예배를 드리고 오후 예배를 드리기까지 3시간이 남는다. 점심을 먹은 후 거기에서 담소하며 시간을 보낸다. 보통 8명이 모인다. 신앙 이야기, 옛날 이야기, 살아가면서 경험한 이야기 등등 이야기꽃이 한번 피면 식을 줄 모른다. 점심을 먹은 후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면 배가 출출하다. 쉼터 환경은 거저 그만이다. 고급 소파, 냉장고, 텔레비전, 전자레인지, 냉난방시설, 커피, 각종 차들이 떨어질 날이 없다. 사물함도 있다. 일손을 놓은 분들이라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다. 대부분 점심 식사 후 동혜실에 오후 예배를 드리려고 모이지만, 나는 약국에서 점심 후에 왕릉을 한 바퀴 도는 습관 때문에 동광초등학교 운동장에 간다. 어린시절 나는 동광초등학교 옆 골목길에 살았다. 동광초등학교는 옛 추억을 드듬기에 좋은 곳이다. 정문에 있는 100년이 넘은 은행나무, 운동장 위에 있는 교무실 앞에 오래된 정원수들을 바라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속이 텅 빈 반세기가 넘은 나무들이 몇 그루 있다. 벌레 먹고 찢어지고 휘어진 정원수들은 오랫동안 온갖 풍상을 겪으며 살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가끔 나는 은퇴한 장로님들에게 부담감을 느낀다. 어떤 때는 밀감과 아이스 크림을, 어떤 때는 외국인이 먹는 큰 빵을 산다. 최근 운동을 마치고 학교 앞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몇 번이나 사려고 했으나,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이 마트에 손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한 번 가게 앞에서 술 마시는 사람은 보았는데 요즘은 파리만 날린다. 
지난 주였다. 마침 운동을 마치고 거기에 들어가기에 나도 따라 들어갔다. 가게 입구에 크다란 냉동고가 가로로 놓여있다. 일반 마트, 은행, 작은 가게에 자주 다니지 않아서인지 서먹했다. 몇 년 동안 혼자 가게에서 물건을 구매할 일이 거의 없다 보니 행동이 어색했다.
냉동고 속에 있는 둥근 아이스크림을 가리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아이스크림 10개만 주세요."
예상하지 않은 말이 내 귀를 파고들었다. 불과 1m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50대 남자가 소름이 끼칠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카운터에서 꼼짝도 못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꼭 저렇게 말해야 하는가 생각했지만, 태연한 척하고 아이스크림 10개를 꺼내 카운터에 올려놓았다. 6천 원에 비닐봉지 20원 모두 6천20원, 예상보다 값이 쌌다. 우리 카페도 이렇게 저렴한 아이크림을 팔면 좋은 텐데, 왜 갖다놓지 않을까. 
돌아오면서도 그 분을 이해하려고 했지만, 아쉬은 생각이 지울 수 없었다. 물론 물건을 직접 골라 계산대로 가져가는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내 탓도 있지만, 매장에 단 두 사람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얼마든지 봉사할 수 있지 않을까? 가게에 손님이 없는 이유도 무관하지 않겠다. 다시 이 가게에는 가지 않겠다고 작정했다.
동혜실에는 이야기꽃이 한창 피고 있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했다.
전화가 왔다. 아내였다.
"우리에게도 아이스크림 사주세요."
"어떻게 알았지?"
아무도 보지 않았는데 정말 이상했다. 20분이 지났다.  아내가 동혜실에 왔다. 
"돈 좀 주세요."
"카드 쓰면 될텐데."
돈 달라는 말을 들은 분들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돈 좀 달라는 말에 그렇게 깊은 함정이 있는 몰랐다. 아내는 계속 돈 달라는 말만 계속했다. 자기 카드와 현금도 있는데 왜 그러지?
하도 돈 달라는 말에 못이겨 양복 안주머니에 손을 찌르는 순간 머리가 멍했다.
"아, 내 지갑."
주일헌금을 넣고 아이스크림을 살 때 지갑에서 돈을 꺼낸 사실이 분명하다. 거기 있는 분들이 놀라 모두 우리를 주시했다.
"어떤 의도가 있는데."
누가 말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그 이상 숨길 필요를 느끼지 않은 아내는 지갑을 받더니 8만 원을 빼고 돌려주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셈이다.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으리라.
똑같은 일을 두 번하면 바보다. 나중에 집에서 다시 찾게 된 경위를 들었다.
사무실에서 자기에게 지갑을 찾아가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교인 한 사람이 문 앞에서 습득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어디에서 떨어뜨렸나를 생각해보았다.
지금까지 지갑을 내 평생 한번도 분실한 적이 없다.
아이스크림을 산 후 지갑을 바로 안호주머니에 넣지 않고 무의식 중에 비닐봉지와 함께 들고오다가 교회문을 열다가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동혜실에 온 것이다. 지갑속에는 명함 두 장, 돈 10만 원, 신용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아내가 우리도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한 말도 넘겨짚어 한 말이었다.
세상만사가 지금까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여 나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다. 
유튜브를 보면 외국인이 한국인 시민의식을 시험한다고 일부러 지갑을 여러 번 떨어뜨렸다. 100에 100사람 모두 주워 돌려주었다.
설령 교회 밖에서 지갑을 흘렸다 해도 돌려준다는 믿음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복 받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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