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외롭고 헛헛한가?

정삼열 | 2024.05.07 09:58
나는 아침정원이 너무 좋다. 어둠을 걷어내고 커튼이 열리는 순간 꽃을 보며 시작하는 하루는 잠시겠지만 모든 시름을 잠재울 수 있어 좋다. 

텃밭을 거닐며 식물들의 점호를 시작하다 보면 식물마다의 독특한 향기에 취해 걸음을 멈추게된다. 허브향에서 부터 모든 식물은 저마다의 향기를 품어낸다.  

꽃은 말할 것도 없고 토마토 향이 강열하기는 하지만 힐링에 더할 나위 없이 좋고, 그 중에 생강에서 나는 냄세는 너무 독특해 오랫동안 머무르게 만든다. 나는 식물들과의 대화에서 말하는 것보단 듣기를 좋아한다. 하루에도 몇번씩 화단과 텃밭을 드나들며 대화를 나눈다. 시상을 떠올리기도 하고 글소재는 물론 내 삶의 모습까지도 발견하며 내 갈 길을 묻기도 한다.  

이슬을 머금고 꽃을 피워내는 장한 모습을 보며 나를 성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경청과 연민이 없는 정의는 폭력이다. 나는 정의로운가?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정의는 오랜 시간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성찰이 없다면 폭력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고 쏟아내는 말이나 글들은 악취가 나는 잡담이자 편견일 뿐이다.  

그래서 묻는다. 나에게는 과연 문화가 있는가? 오랜 시간을 기다린 향기가 나는 ‘정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를 뿌린 적이 있는가? 이제 식물 옆에 '반려'라는 말이 꽤 자연스러워졌다. 아예 '동거 식물'이라는 이름까지 붙인 책도 나왔는데 난을 키우고 화초를 가꾸는 게 중장년층의 취미라 여기던 때도 있었지만 최근엔 '플랜테리어(plant+interior)'란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식물에 대한 관심이 광범위해졌다. 

외롭고 헛헛하지만 개나 고양이를 돌볼 힘까진 도무지 낼 수 없어, 무심코 들였던 화분에 위안을 받는 청춘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벌써 사흘째 비가 내리고 있다. 새악시처럼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해질 무렵부터 비가 그칠 조짐이 보이는데, 계절을 불문하고 비는 추억을 불러온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으면 추억의 소리가 넘실거린다. 

조팝꽃이 하얗게 피어나던 그 푸릇한 오월에도, 가느다란 줄기에 꽃이 무거워 사정없이 고개를 숙이는 수국의 계절에도, 무성했던 나뭇잎을 털어내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가을에도, 그리고 죽음을 망불케하는 혹한의 계절에도 추억은 여전히 가슴 한켠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느닷없이 비가 오는 날이면 내 가슴은 서걱인다. 나는 기승전결을 명확하게 정리하는 것보다 때로는 여백으로, 때로는 실루엣(silhouette)으로 남겨 놓는 일이 많다. 아무리 인격적으로 저질스러운 몹쓸 인사라 하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그리움이나 후회로 남을 수 있기에 칼로 무우 자르듯 하지 않는다. 그간 내 주변을 스치고 지나간 수많은 군상들이 떠오르고 고독한 수도승이 되어 버린다. 

나는 유독 비에 약하다. 하늘을 보며 비를 손으로 받아보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비의 맛을 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비를 즐기며 걷는다. 빗속에서 발로 느끼던 흙의 감촉, 손바닥 위로 떨어지는 빗물의 알싸한 기운, 흐르던 빗물을 발로 가르며 걷던 그것들까지 그리워진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비가 내리면 센티해 진다. 

내 기분, 내 정서에 맞으면 그것이 선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음을 참회하게 된다. 사람의 입맛은 연애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쳐다보기도 싫거나 혐오했던 음식도 어느 순간 먹을 만해진다. 심지어 마니아가 되기도 한다. 

내겐 호박죽이 그랬다. 엄마의 꾸중에 못 이겨 마지못해 물컹하고 진한 호박 냄새가 났던 죽을 맛을 봐야 했다. 억지로 먹다 보니 언제부턴가 그 맛이 참 좋게 느껴졌다. 나도 호박죽을 ‘배운’ 것이다. 호박죽이 맛있는게 아니라 어머니가 그리운 것일게다. 추억을 끄집어 내어 보기 위해서이다.  

나이를 먹다 보니 그 전엔 싫어 하던 걸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던 것에 대한 애착을 나도 모르게 버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많이 바뀌었다. 죽고 못살았던 친구를 멀리한 경우도 있었고 나이먹으면 여유작작하며 살겠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으며 허튼 시간을 보내던 내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익숙했던 일들을 청산하는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살다보면 이별이 참 많다. 이별이라는건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익숙해지기 어렵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내가 속해있는 조직과의 이별, 가족과의 이별, 내가 아끼는 물건과의 이별 등등. 신기한건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그 때 그렇게 망설일 필요가 없었는데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별엔 좀 더 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쿨한 척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감정에 쿨할 필요는 있다. 내가 즐겁고 의욕이 생기고 순간순간 기쁨을 느낀다면 이별은 필요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감하게 이별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세상 재미에 빠져 들거나 돈벌레가 되려는 건 아니다. 안해도 되는 건 안하려 작정했고 내 목표를 이루는 순간까진 한눈팔지 않겠다는 결심이 흐트러질까봐 일부러 내 자신을 채근하고 있을뿐이다.  

물론 100% 만족하고 100% 싫은게 어디 있겠나. 수치로 표현할 수 없는, 내 순간의 느낌에 충실한다는 말이다. 만약 어떤 이별로 인해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나는 어떨지 등등을 생각하는건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그리고 꼭 내 생각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한) 것에 대한 쓸데없는 걱정이다. 내 감정에 충실하게, 매 순간 충실하되 나에게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이별할 수 있는 것, 이런게 쿨한 이별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살다 보면 또 다른 길이 내 앞에 펼쳐지겠지.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그 어떤 무엇이든. 물론 어렵다. 하지만 한편으로 쿨한 이별이 어려운 이유는 그 전에 매 순간을 충실하게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살기로 했다. 요즘 몸이 부실해지는 느낌이 든다. 병원에 가보라 성화이지만 세상과 이별할 시간이 오면 가면 된다며 웃어 넘긴다.   

얼마전 내 대신 부조금을 전달하고 온 친구녀석이 분명히 부조금을 전달하기는 했는데 죽은놈은 말이 없다고 하더니 두몫이라고 이야길 했지만 영수증을 받아 오지 못했다며 호들갑을 떤다. 삼재가 끼어 있어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내 말을 안듣더니 황천에 갔다며 무조건 미신이라고 매도하지 말고 귀담아 들을 만한 소린 귀담아 들어야 한다며 가르치려 한다. 

배울만큼 배운 친구이지만 미신을 신봉하여 자기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내뱉었던 "너는 해로할 팔자가 없다"는 말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단다. 늙으막에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살면 좋을텐데 내 주변엔 금실 좋은 친구들이 별로 없다. 아니, 아내들의 반란으로 남편들의 처지가 형편없이 주저 앉아 버렸다.  남자들 끼리 해외 여행하는 경우는 드물지만 여자들 끼리 해외 여행하는 건 너무 흔한 일상이 되어 버렸다. 

남자들은 젊어서는 친구를 찾지만 은퇴하면 아내 곁에 있고 싶어하는데, 여자는 반대로 친구들 곁에 있고 싶어한다. 보편적으로 퇴직한 남편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주부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은퇴 남편 증후군’(Retired Husband Syndrome)이다. 다분히 내 관점이지만 은퇴후 '오순도순' 노년은 커녕 온종일 '옥신각신'으로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991년 일본에서 처음 이름 붙인 이 증후군은 은퇴 남편을 돌보느라 아내의 스트레스 강도가 높아져 정신적ㆍ신체적 이상이 나타나는 걸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정신의학계 등이 본격적으로 이 증후군을 다루거나 크게 사회 문제화하고 있지 않은 상태라 정확한 통계는 잡히지 않고 있지만 그러나 조기퇴직과 고령화 등과 맞물려 점차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인한 생활환경 변화에 적응도 쉽지 않은데 남편이 집안 일에 간섭이라도 하게 되면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배가된다. 한국인의 평균 기대수명과 근로자의 평균 퇴직 연령 간에는 약 30년의 격차가 있다. 그만큼 노후에 부부가 함께 할 시간은 갈수록 길어지고 있지만 준비는 턱없이 미흡한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우울증 같은 은퇴 남편 증후군은 황혼이혼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령화 시대에는 가장의 은퇴에 대비, 경제적 준비뿐 아니라 심리적 준비도 절대 필요하다. 은퇴 남편쪽에서는 최소한 ‘점심은 혼자 챙겨 먹겠다’는 식의 홀로서기에 나서야 하고, 아내들도 자신만의 삶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찾아야 한다.    

부부는 원래 하나가 아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지 않던가. 다른 둘이 서로 만나 한 방향을 보며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부부생활이 처음부터 동상이몽인지도 모른다.  그 꿈을 깨야 부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고독해진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래서 많은 도시인들이 은퇴 후 한적한 시골에서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로망을 품는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이 고독해지는 이유는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공동체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마음의 울타리를 높이 쌓고 주거를 상품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고독해지는 것이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정원의 잡초를 뽑고 하우스 안에 아욱을 모두 뽑아내어 버렸다. 아직 먹을만 하고 충분히 상품 가치가 있지만 어제 아내가 대충 아욱을 잘라간 이후라 아깝지만 뽑아내고 열무를 더 심으려 땅을 뒤엎어 버렸다. 비를 맞아서인지 몸이 으시시하다. 하지만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나만의 시간으로 돌아오면 곧 마음이 편해진다. 

사흘만에 비가 그치고 논에 물이 가득하여 곧 모내기가 시작되어도 될만큼 많은 비가 내린 것이 감사하기만 하다. 비가 그친 밤의 적막이 나를 시상의 세계로 불러낸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밤이 왔다. 하루동안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처소로 돌아가 달콤한 꿈을 꾸고, 이름 모를 풀꽃들도 살며시 눈을 감는 시간. 고요와 적막 속에 풀벌레 울음소리와, 가끔씩 밤바람 뒤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만이 정겨움으로 다가온다.   

내리는 비를 보며 산만했던 내 인생을 조곤조곤 정리해 본다.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다 잔디밭에 돌출한 잡초가 보기 싫어 뽑다보면 가량비에 몸이 젖는다. 친구는 비에 젖은 쌩쥐 모양을 보며 '에미잃고 비에젖은 강아지 꼴'이라며 타박을 한다. 잡초도 살겠다고 나오는데 그냥 놔두란다. 비맞고 골목길을 돌아서며 중얼대는 중처럼 왠 구시렁이냐며 타박으로 대꾸한다. 

서서히 어둠이 내려 앉는다. 나처럼,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 타인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 번잡함을 못 견디어 하는 사람에게 밤은 귀한 휴식의 시간이며 행복의 시간이다. 가녀린 불빛 아래 조용히 음악을 듣기도 하고 밀렸던 생각도 정리하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 나만의 공간에서 지느러미를 활짝 핀 물고기가 되어 마음껏 밤의 수면 속을 떠다닌다.  

고요와 침묵 속에서 생각은 한없이 자유로워지고 늦은 밤 정원을 바라 보노라면 자연 위에 존재하는 모든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아침을 기다리는 적막 속에서 생각은 쉬지 않고 밤하늘 높이 떠다닌다. 나는 이 밤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모든 아름다운 자연을 지으시고, 내 호흡을 지켜 주시며 선한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내일은 인부들을 총동원하여 군산 현장을 방문하여 콘크리트 타설과 수도공사를 해주기로 했다. 포크레인 기사에게 정확한 주소를 전달하고 아침 일찍 출근토록 지시하고 레미콘 회사에도 연락하여 내일 오후 한시와 두시에 현장에 도착하도록 확인하고 와이메시와 거푸집도 아침 8시에 현장에 도착시키라고 당부했다. 군산 레미콘 영업사원은 개정 현장엔 레미콘을 보내 줄 수 없다고 거부하여 몇만원을 더 주기로 하고 익산 차를 불렀다. 

내가 책임지겠다는데도 한결같이 미리 입금시키지 않으면 출고시킬 수 없다 하여 소장이 선결제를 하였다는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여 일단 강행하기로 했다. 현장에 투입했던 업자들 모두가 고개를 가로지으니 참 대략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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