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Km는 의무적으로 가 주어야 할 거리
‘오리’는 1마일로 약 1.6Km이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통치 아래 있던 백성들에게 로마 군인이 오리를 가자하면 이유블문하고 꼼짝없이 가야 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로마 군병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다. 로마 군인들이 그렇게 할 때 시몬이 꼼짝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갈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런 규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억지로 오리를 가고자 할 때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고 했다. 이것은 마지못해 오리를 가줄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더 해주라는 말이다. 우리가 바쁠 때 내가 안 해도 될 일을 부탁받았을 때 우리는 짜증이 나고 거절하기 쉽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우리는 기쁨으로 그 부탁받은 일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게 제자의 삶이 아닌가?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일년이 넘었지만 이미 분양했던 집의 노리 부분이 이번 비로 흙이 빠져 나가는 바람에 웅덩이가 패였는데 장마철이 돌아오기 전에 콘크리트로 보강 공사를 해달라는데 한동안 피하다가 결국 견디다 못해 펌프카를 부르고 레미콘에 인부 4명을 불러 공사를 마무리해 주었다. 엄밀히 따지면 내가 시공자이긴 했지만 집 주인은 각각이었고 이윤도 모두 각자가 얻어 갔었는데 '만만한게 홍어0"이라고 나를 불잡고 통사정하는 바람에 견디다 못해 많은 돈을 들여 마무리지어 주었다.
일당을 받고 일하는 현장소장을 비롯 인부들은 수천만원씩 이윤을 본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인데 사장님이 대신해주는 것만 해도 불만인데 장비대 인건비 식대 등 300여만원을 들여 왜 이 일을 해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며 볼멘 소릴 한다. 이윤을 얻은 사람들이 모두 피붙이들인데 야박하게 나몰라라 할 수 없고 내가 약간 손해를 보면 모두가 평안한데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라는 말씀을 실행해 보는 것도 손해는 아니라는 생각에서 하루를 봉사의 날로 삼았다.
인부들이 저간의 사정을 알기에 인건비 받는게 미안한지 한사코 안받으려 하지만 오히려 이만원씩 더 주었다. 그리고 당사자들을 불러 샤브샤브 칼국수로 대접하며 이번 기회로 홀가분해지라고 위로 했다. 당사자들도 일년이 넘었는데 계속 하자도 아닌 걸 문제삼으며 스트레스를 주었는데 제대로 공사를 해주었다는 소리에 안심하는 눈치이다.
십시일반으로 공사비를 거출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복받을 기회를 빼앗지 말라며 오리를 가자는 말에 십리를 가주니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만큼은 어느날보다 상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사를 마치고 이젠 하자 보수 기간을 넘기기도 했지만 문제가 발생하면 직접 당사자들에게 부탁하라며 내가 선처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끝일지는 내 자신도 모른다. 심한 경우에는 삼사년이 지난 집도 가끔 정원을 가꿔주거나 부속건물을 지어 주는 일로 분주할 때도 많기에 장담할 수가 없지만 이익이나 수익도 없는 일에 자주 동원되다 보면 내 일에 지장을 받을 때가 많아 약간은 내 자신을 컨트롤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움이 필요하고 약해져 있을 때 이웃을 돕는 것은 참된 기독교인의 바른 태도이다. 늙고 병든 사도 바울은 자신을 배반한 제자 데마 때문에 큰 실망에 빠지게 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병들고 지친 사도 바울을 애제자 데마는 스승을 위로하고 고통을 공유해야 했었다. 그러나 애시당초 스승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담대한 신앙을 지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고난에 처한 바울과 동역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인생 초년에 여러 가지 실수로 큰 오점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말년에 마음을 바꿔 회개하고 돌아오면 영웅이 될 수 있다.
특히, 자신을 가르쳐 사람 되게 했던 스승을 배신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다. 늙고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스승의 곁을 무정하게 떠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행동이다. 어렵고 힘들 때에라도 끝까지 옆에 있어주는 태도가 참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닌가? 아직도 내 주변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반면 몰인정하게 데살로니가로 떠난 사람도 있다.
난 모든걸 접기로 작정했기에 그들을 원망하거나 질타하려는게 아니다. 현대 사회는 연약한 스승이나 지도자를 함부로 버리고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과감히 떠나는 경향이 많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만을 만나며 베푸는 기회주의자보다, 한번 맺은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지조를 보수하는 우직한 인물이 오늘날 공동체에 필요하다.
어렵고 힘들 때를 피해 떠나는 변절자나 배신자의 삶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당(黨)을 이리저리 옮기는 정치인이나, 큰 교회를 좇아서 사역지를 옮겨 다니는 목회자를 우리는 성숙한 리더라고 말하지 않는다. 유다의 키스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곤 했었다.
근래 하루종일 고된 중노동을 하면서 제대로 식사를 못하지만 음식이 땡기질 않는다. 라면을 끓이거나 만두국을 끓여도 바닥을 보이는 경우는 없다. 잠도 그전만큼 깊게 숙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경제가 어려운 시대이고 보니 인간관계도 예전만 못하다. 하지만 데마가 데살로니가로 간 것을 마음 속에 오래 담아두지 말자고 마음속에 다짐하면서 캄캄한 깡촌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가까이 하고 실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던가? 사람 너무 좋아하면 그 끝은 정말 고독하다. 공연히 친근감을 들어내다간 오리가 아니라 십리를 가야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정말 천국이 있다고 믿는다면, 상급이 있을 거란 말씀을 믿는다면 그게 손해보는 일만은 아니다.
"No Cross No Crown."이다. 문제는 십자가없는 면류관을 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고 한국교회가 쇠퇴의 길을 걷는 것은 십자가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으려 하기에 오늘도 쓸쓸하게 오리를 혼자 가는 사람들이 많다.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요즘 건강해진 것 같다며 덕담을 건내는 데, 햇볕에 검게 그을린 모습이 그렇게 보였나 보다. 허나, 깊은 숙면을 하지 못하고 한밤중에 한번씩은 잠에서 깨는 바람에 수면이 부족한데, 시골생활은 눈에 보이는게 일이니 안할 순 없어 피곤이 누적되어 가는 것 같다. 벌써 햇수로 여러번 경험했으니 농삿일이 힘들다고 여기진 않는다.
몹시 힘들고 외로울 때 모든 근심 훌훌 털고 다시 일어나 나를 향해 떠오르는 밝은 태양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 인생은 짧고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자질구레한 일들로 삶을 채우며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곧 지인의 집을 지어 주기로 했다. 평당가격으로 충분한 이익을 보장받고 일하라는 소장의 말을 한귀로 흘려 보내고 50일 동안 일당 20만원씩 천만원만 받기로 했다. 대신 직접 주인이 자재비 인건비 등을 결재하는 조건으로 제대로 된 집을 지어 줄 생각이지만 우리 인부들 인건비만큼은 다른 현장보다 많이 받아 주기로 했다.
매일 유류비만 해도 매력있는 현장은 아니지만 작품(?)을 만든다는 사람이 돈보고 일할 순 없기에 이번 텀은 쉬어간다는 차원에서 내사업은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남의 집을 지어줘봐야 나에겐 마이너스가 될지도 모르지만 이런 불황 땐 잠시 쉬는 것도 지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라도 재개할 날을 기다리고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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