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네임 이즈 '鄭率居'

정삼열 | 2024.04.22 11:14

통일신라 때 솔거(率居, ? ~ ?)란 화가가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老松)이 얼마나 실물과 같았던지 새들이 날아들었다 부딪혀 죽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데, 유리창에 비쳐지는 풍경이 진짜 소나무 정원으로 착각을 일으켰다면 나도 '鄭率居'라고 불러야 될지도 모르겠다. 

공사장에 나가는 날은 어쩔 수 없지만 보통 평일이라면 나는 정원을 기어다니며 풀을 뽑고 그간에 심겨진 작물과 대화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이 때가 가장 즐겁다.

정원에 머무르면서 내 생각은 깊어지고 인생을 정리하는 참회(?)의 시간을 가진다. 그렇게 후회할 일이 많았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을 못하겠지만 아무튼 내 삶에 몇가지쯤은 정말 후회스런 일들과 날들이 있었을 것이고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할 대상이 분명 있다. 

우린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는 근시안적인 사고에 젖어 살고 있다. 그러기에 원망과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심리에 젖어 살아갈 때가 많다. 원인을 규명해야 하고, 잘잘못의 시비를 따져 선악에 대한 분명한 결론을 내리고 싶어 한다. 누가 선하고 누가 악한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그러나 해피엔딩은 용서에 있다.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큰 그림을 그려놓고 보면 인간의 할일은 거의 없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면 각자의 취향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겠지만 난 요셉이란 인물에 대하여 추천을 주저하지 않는다. 요셉이 애굽의 종살이를 마치고 마침내 총리로 등극하고 자기를 팔아 버렸던 형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용서를 선택하게 된다.  

20년만의 해후는 섭리안에 있는 작은 해프닝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이 앞서 보내셨다는 큰 구원의 틀로 보면 원망이나 시비, 그리고 억울하고 무정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수 없는 것이다. 형들이 한짓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는데, 더 이상 어떤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겠는가?  우린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역사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용서한다는 교만까지 버릴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용서하려니까 더욱 힘이 드는 것이다. 절대 해피엔딩은 십자가의 교차점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앞서 보내셨다고 믿는 믿음의 토대 안에서만 가능하다. 요셉은 그걸 실천했다. 그래서 요셉은 위대한 인물이다. 총리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그 경지에 이르기 까지 훈련된 건 아니지만 정원 바닥을 기어 다니면서 이전보단 훨씬 농후해지고 있다는 생각과 진즉 사유의 공간을 가지지 못한 걸 안타까워 하게 된다. 그런점에서 잠시 동안 몸이 피곤해지고 힘겹단 생각이 들긴 하지만 현실레 만족하며 살려 노력중이다. 손주들 재롱이나 보면서 사는 것보단 남들이 돈키호테라는 소릴 한다해도 그냥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내 삶을 디자인하고 싶을뿐이다. 

적어도 내가 이곳을 택할 땐 죽기 보름 전까지는 일을하려는 독한 마음을 품었었다. 사실 엄청 힘이 든다. 평생 험한 일을 해 보질 않아서 조금만 움직여도 허리가 부러지듯 아프다. 그리고 편히 살자는 안일한 생각이 전혀 없는게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그래서 20년, 혹 30년동안 무엇인가를 남겨야 한다는 스케줄을 만들고 처음부터 하나씩 배워가며 노동을 즐기고 있다. 

만약 처음에 귀촌하면서 생각했던대로 얼마만큼의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개척을 한다 해도 일이년 후엔 자립교회를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찼던 못난 생각을 버린 것이 수확이라면 큰 수확이다. 만약 목회의 현장으로 다시 복귀했다면 몇년 동안은 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 이후는? 아마도 더 지독한 외로움과 방황하는 세월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십년을 살 것인가? 삼십년을 준비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지난 시간은 타의에 의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자의에 의해 살고 싶은게 솔직한 심정이다. 눈치를 안보며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란 걸 알았다. 땅은 정직하다. 날 실망시키지 않을꺼라는 절대 믿음이 있기에 고달픈 시간을 참으며 인내할뿐이다.

낮에는 허리가 휠 정도로 일하고 밤엔 글을 만들고 詩를 쓰는 생활도 이제 다음달이면 12년이 다되어 간다. 12년동안 전원주택을 69채 지었고 남의 집도 십여개 만들어 주었다. 

손해보진 않았지만 큰 이익도 없었는데 이 일이 내 존재감을 키워주기에 또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귀촌하겠다는 사람에겐 거의 정원을 만들어 주고 텃밭까지 일궈 넘겨 준다. 아직 귀농인이란 명함을 내밀기 조차 부끄럽지만 이제 겨우 아장이는 결음마를 흉내내며 생명의 신비를 경험한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한 시골생활을 담담히 써내려간 ‘똥꽃’으로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었던 농부 전희식 전국귀농운동본부 공동대표가 18년 귀농생활을 통해 깨달은 소박한 이야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삶으로 농사를 짓고, 환경을 지키는 한 농부 철학자의 농사와 살림, 마음공부, 농업, 문명에 관한 진실. 책 ‘아름다운 후퇴는 농부 전희식의 18년 귀농생활의 종합보고서다. 

지난 80년대 고난과 투쟁의 시대를 누구 못지않게 혁명적으로 보냈던 그는 새로운 길을 찾아 94년 전북 완주로 귀농했다. 그러던 중 치매에 걸린 노모를 모시기 위해 2006년 장수로 삶의 터를 옮겼다. 그 길고 긴 시간 동안 자연재배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고집스런 농부로 살았던 그는 농사의 정신, 농부의 삶을 통해 공동체와 생명, 평화를 갈망하는 생태운동가로 거듭났다.

저자는 ‘아름다운 후퇴’에서 모두가 성장과 발전을 이야기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할 때, 한 걸음 뒤로 물러설 것을 권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후퇴’는 역설적으로 새로운 ‘전진’을 의미한다. 길게는 200여 년의 자본주의 역사, 짧게는 수십 년의 고도성장사회가 인류문명 전체의 발전방향을 놓고 보았을 때 후퇴일 수 있다는 것. 

파괴된 지구의 환경과 파괴된 공동체 문화가 인류의 행복지수를 거꾸로 돌려놓았으니 말이다. 결국, 성장과 경쟁의 사회는 허울뿐인 경제지표만을 남기고 있다는 설명이다. 저자가 뒷걸음질치고 있는 현대사회를 정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고민을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의 방향을 정반대로 돌려 세워야한다는 것으로, 그러한 사고의 전환만이 인류문명의 새로운 전진이 될 수 있다는 역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농부 전희식은 ‘4귀의 삶’을 제안한다. 귀농(歸農), 귀공(歸共), 귀인(歸人), 귀신(歸神)의 네 가지 삶을 말한다. 농사의 정신과 농부의 삶을 돌아보면서 밥 한 그릇의 이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마을 속에서 참다운 공동체 정신의 부활을 찾는다. 또 참사람, 본래 본성으로 돌아가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구하고 있다. 

실제로 농부 전희식은 아이들과 함께 꾸려가는 ‘100일 학교’와 귀농운동본부의 ‘귀농학교’를 통해 삶의 주인이 되는 길을 모색한다. 일찍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토마스 제퍼슨은 "농부와 교수 중 오히려 인위적 규칙(artificial rules)에 미혹된 적이 없는 농부가 더 잘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까지 얘기한 바 있다.

땅만파고 흙만 만지는 거친 손이지만 그 손으로 생명을 키워내었고 자식들을 키워냈다. 시골엔 모두 철학자들뿐이다. 오염된 사고가 아니라 콩심으면 콩이 난다는 걸 알기에 꽃샘 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콧물을 흘리며 흙을 매만진다. 아직 결실을 말하기엔 성급하지만 그래도 농부들은 지금 희망을 바라보며 산다.

나도 능수능란하려면 아직 멀었고 희망이 있을지, 어떤 결과를 만들어낼지 장담할 수 없지만 설령 헛고생하며 인생을 끝낼지 모르지만 귀농(歸農)이 귀신(歸神)된다면 그건 전혀 손해되는 일이 아니다. 땅을 파며 하나님을 더 알게되고 창조의 섭리를 이해한다면 수지맞는 장사이다. 그래서 오늘은 고통스런 날이 아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독자의견
rss
연안부두
차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가 에서 처음 대했던 두리 new
날짜 : 2024.05.20 12:04 / 댓글 : 0  
    
오늘은 절기상 만물이 생장하고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이다. 입하와 망종 사이에 ..
'촌놈 마라톤'하듯 죽어라 뛰고 보는 군상들
날짜 : 2024.05.19 10:58 / 댓글 : 0  
    
간밤에 어깨 통증때문에 고생했다. 며칠 동안 건축 현장에서 철근을 결속선으로 묶는 작업을 ..
임을 위한 행진곡
날짜 : 2024.05.18 11:39 / 댓글 : 0  
    
오늘이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
몸은 하나인데 할일이 너무 많다.
날짜 : 2024.05.17 11:11 / 댓글 : 0  
    
요즘 신종어인 '호모 사피엔스(Home Sapiens)'에 비유해 스마트폰에 의해 삶이 변..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날짜 : 2024.05.16 11:25 / 댓글 : 0  
    
출근길에 지나는 마을 입구에는 수 백년 된 느티나무가 속을 비운채로 서 있는 걸 본다. 텅..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밑에는 절로 오솔길이 생긴다
날짜 : 2024.05.15 09:10 / 댓글 : 0  
    
"작위불의태성 태성즉위(爵位不宜太盛 太盛則危) 능사불의진필 진필즉쇠(能事不宜盡畢 ..
사람이 일이 있을 때가 행복하다
날짜 : 2024.05.14 10:50 / 댓글 : 0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아직은 아니다.
날짜 : 2024.05.13 10:45 / 댓글 : 0  
    
새벽에 출근하여 집에 돌아와 두시간 하우스에 물을 주고 풀과의 전쟁을 벌렸다. 사실 풀을 ..
식은 커피가 더 달다.
날짜 : 2024.05.12 10:18 / 댓글 : 0  
    
나는 참으로 어벙한 사람이다. 어벙이란 말은 '똑똑하지 못하고 멍청하다'는 뜻인데, 멍청하..
한평생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들을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날짜 : 2024.05.11 09:55 / 댓글 : 0  
    
새벽에 집을 나설 때 눈부신 태양을 보며 출근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날이 흐려지고 금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