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

정삼열 | 2024.04.21 08:45
어제부터 비가 내린 탓인지 녹음이 짙어지는 기분이다. 지난 가을 모든걸 내려놓고 겨울 여행을 떠났던 헐벗은 가로수를 쓰다듬는 그 따뜻한 손끝과 이따금 지나가는 산새들의 아슴아슴 내비치는 그 모습들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 

오늘도 안개비가 내려서인지 나무 가지 끝에 수정처럼 매달린 꽃잎은 나의 피곤한 육신을 향기롭게 적시며 수줍은듯 미소를 짓는다. 

모든 나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린다. 서로 먼저 꽃을 피우겠다는 열정이 대단하다. 비가 내린 탓인지 잡초는 호미가 없어도 왠만한 건 손으로 잡아당겨도 뿌리가 뽑혀져 나온다. 예배드리고 와서 해질 무렵까지 풀을 뽑았다. 아직 멀었지만 바빠지기 전에 지금밖에 풀을 뽑을 시간이 없기에 게으름을 펼 수가 없다.

앓던 이가 빠지는 기분이다. 지난 가을부터 억새 뿌리를 뽑아 불에 태운 것만해도 트럭으로 한 차는 될텐데, 아직도 많은 분량이 남아있다. 제초제를 사용하면 땅이 변질되기에 미련한 제래식 방법으로 일을 하다보니 손에 물집이 잡히고 터지기를 반복하면서 손이 거칠어졌다. 오른 손가락이 부자유스러워 주로 힘쓰는 건 왼 손으로 하다보니  이젠 왼손잡이가 된 것 같다. 

농촌 사람들 모두가 그렇겠지만 참 무던히도 일을 많이 했다. 내 생전, 요근래 몇일이 60평생 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인 것 처럼 느꺄진다. 그래도 해가 지고 밤이되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봄을 지나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이지만 아직 겨울이 완전히 떠난 건 아니다. 오늘 교회를 가면서 털옷을 입고 나섰다가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것 같아 창피해 죽을뻔했다. 

풀을 뽑다가 지칠 때쯤 커피 한잔을 들고 늘 하던 습관대로 창가에 앉아 홀리팜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긴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심한지 아침 저녁으론 안개가 자주 낀다. 아침나절엔 멀리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의 불빛이 짙게 깔리는 안개로 희미하게 보인다. 나는 문득 혼자라는 생각이 들곤 하지만 홀리팜엔 말없는 친구들이 가득하다. 

근래 몇번의 이사중 고양이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이번엔 마당이 넓고 비닐 하우스를 거처로 삼으니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 마당에서 풀을 뽑다보면 몸을 비벼대며 먹이를 달라고 칭얼대며 애교를 부린다. 이웃집 고양이들이 부러워 죽을 지경인가 보다. 우리집이야 제대로 된 식사를 안하니 주로 사료를 제공하는데 고양이 사료가 왠만한 사람은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비싼 가격이지만 나에게 주는 즐거움에 비하면 감당할만 하다. 

어둑해지는 늦은 오후 나는 또다시 커피 한잔을 들고 창가에 앉아 여유작작하지만 정원에선 계절의 흔적을 지우려는 생명들의 움직임이 치열하다. 확연하게 들어난 녹음은 아니지만 왠지 청순한 색체로 덮혀가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봄은 가혹한 달이라고 했던가. T. S. Eliot은 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에서 태어나 영국으로 이주한) 영국 시인이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탁월한 통찰, 문명과 문화에 대한 예리한 비판. 마티스, 샤갈, 모네가 색채의 마술사라면, 엘리엇은 언어 표현의 마술사이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유창한 언어 표현 덕분에 그의 시집에 인쇄된 시 전체가 뮤지컬 <캣츠> 넘버의 가사가 되었다. 

하지만, 엘리엇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한 문장은 누가 뭐라 해도 '황무지(The Waste Land)'의 첫 줄 '4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다. 생명이 약동하는 4월이 가장 잔인한 것은 죽음과 같은 삶을 강요당하는 현실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로 '4월은 잔인한 달'이란 역설이 많은 공감을 얻게 된다. 

아마도 4.19혁명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젊음과 숭고한 영혼이 무고한 붉은 피를 뿌려야 했다는 점에서 1960년의 4월은 자유가 약동하는 빛나는 꿈의 계절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자유라는 이념과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지향하기 위하여 저항한 사람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요원했었을 것이다. 이처럼 4월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세력에겐 의미가 남다르다.

이상화(1901~1943) 시인이 나라 잃은 슬픔을 피를 토하듯 절규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엘리엇의 `잔인한 봄`과 오버랩된다. 일반적으로 많은 시인들은 봄을 `밝음 탄생 생명 이상 기쁨` 등 긍정적이며 희망적 이미지로 표현하지만 엘리엇의 봄과 이상화의 봄은 전혀 딴판이다. 

대한민국의 단면을 보는듯 싶다. 그래서 봄이 되었지만 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두 옮겨 심은 나무들이라 올핸 꽃도 피지 않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엘리엇이 말한 잔인함은 그런 황폐함조차 이겨내고 언 땅을 뚫고 나오는 놀라운 생명의 강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면 잔인하지만 그 속에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발견할 것이라는 희망을 말하고 있다. 

봄은 생명의 부활이다. 죽음과 절망조차 이겨내는 라일락의 소생과 마른 구근의 부활은 그래서 그냥 잔인한 게 아니라 ‘가장 잔인한(the cruelest)’ 봄의 고백이다. 봄비로 잠든 뿌리를 흔들어 생명을 일깨워야 하는 고통을 감내하더라도 `잔인한 달`로 불리는 4월이 가기 전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벽에 빛이 넘치는 변화가 오면 좋겠다. 

하루종일 커피 몇잔으로 끼니를 대신했지만 배가 고프지 않다. 몇일동안 신경을 곤두 세운 일과 무리한 탓에 약간의 감기 기운이 있지만 컨디션은 그런대로 괜찮다. 일없이 가만히 있을 때보다 육신은 힘들지만 일에 집중할 때 오히려 힘이 솟구친다. 다분히 정신적이고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지 이렇게 몸관리하는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철근도 씹을 것 같은 건강을 자랑하던 동역자 한 분이 혈액암으로 소천을 받았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신학교 오기 전 주먹세계에서 한가닥했다고 간증하던 최성0목사를 비롯 춘천의 유명 부흥사 이0호목사도 부르심을 받았고 작년 한 해 동안 절친 세명이 죽었다. 한명은 폭우속에 사고사를 당했고 한명은 치매로 앓다 코로나 19로 타계했고 한명은 갑짜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나야말로 일찍 졸업했다고 해도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이지만 건강했던 사람들이 맥없이 무너지는 걸 보니 무쇠건강이라고 꼭 장수하는 건 아닌가 보다. 군산이 고향이라 학창시절부터 가까이 지냈고 울산에서 함께 목회했던 인연상 의정부 장례식장에 가봐야 하지만 내일 중장비를 불러 일을 하기로 했기에 조의금만 건내기로 했다. 얼마 안있으면 다시 만날텐데 그 때 사과해야겠다.   

지금까지 세번의 죽을 위기를 넘겼고 시골에 정착하면서 사실은 등이 굽고 나이에 비해 조로현상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내 자신이 먼저 알고 있다. 그렇다고 몸을 사리고 싶진 않다. 나에겐 매일 매일이 '잔인한 달'이다. 희망의 봄은 안주(安住)의 겨울잠에서 나를 깨운다. 

모든 식물들이 차가운 날씨에 생명이 없는 돌과 메마른 땅을 뚫고 나와야 하기 때문에 연약한 씨앗의 새싹으로서는 갈등 상황이다. 그래서 가장 잔인한 달일지도 모른다. 모순이다. 그러므로 역설이다. 희망에 차야 할 새벽에 5분만 하면서 누워있는 우리 모습이 아니던가? 얼어 붙었던 땅을 파헤치며 꽃씨를 엄청 뿌렸다. 

동토의 땅에 있었을 때가 '씨'는 따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턴 생명을 키우기 위해 모진 비바람을 견디어야 한다. 아직 물러가지 않은 꽃샘 추위와도 한판 투쟁해야 한다. 그래서 오히려 봄이 잔인할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남은 시간들은 안락하고 편한 것만이 아니다. 지금부터가 잔인한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지난 날들이 나에겐 꽃피는 봄날이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60세가 되면 시골에서 회갑잔치를 크게 열었다. 그 나이가 되기까지 사는 사람들이 적어서 50대도 노인 행세를 했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을 찾은 1960, 70년대부터 평균수명이 차츰 늘어나 이제 한국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80세까지는 살 수 있다고 한다. 내가 살고있는 이 동네에도 평균 년령이 80세 정도이다. 

요즘 여든을 넘긴 할머니 두 분이 정신이 혼미해지는 증세가 있어서 걱정이란 소릴 듣는다. 혼자서 살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땅히 갈데도 없다. 두 분 모두 자녀를 많이 두신 분이다. 그러나 누구 하나 책임지고 모시겠다는 자녀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자녀들도 마음이 아픈 것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치매끼가 있는  부모를 모시기에는 너무나 어려움이 많으니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다. 

치매 환자가 있는 집은  가정이 파괴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오늘날은 옛날 농촌 살림살이와 달라서 모두들 바쁘게 살아가는데 그런 환자가 있으면 한 사람은 늘 붙어서 간호를 해야 한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청년 실업자가 334만명이라니 자녀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제3자 입장에서 보니 장수하는게 꼭 복은 아닌 것같아 씁쓰레한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그 나이까지 살게 된다면 그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난 나일먹어도 자식들과 가능하면 멀리 살려고 작정했다. 아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마음에 맞는 친구들하고 공동체를 형성하여 일을 하다가 때가되면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되도록이면 가볍게 살려고 노력중이다. 

나일먹을 수록 더 깨끗해야하고(Clean Up), 더 옷에 신경 써야 하고(Dress Up), 더 상대방 말을 들어주어야 하고(Shut Up),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Show Up), 더 잘 어울려 주고(Cheer Up), 더 지갑을 열고(Pay Up) 더 포기해야만 한다(Give Up). 이것은 나이 들어도, 존경받는 7가지 방법으로, 오래 전부터 회자(膾炙)된 내용이다. 

80세를 넘기면 점괘(占卦)도 안나온다는 말이 있다. 신앙도 노쇠한다. 기도도 잘 안나온다. 젊었을 때 열심히 신앙인격을 길러 놓아야지 나일먹으면 하나님도 가물 가물하는 은퇴목사님을 많이 보고있다. 늙는다는 건 서글픈 일이다. 그래서 잔인한 봄을 노래하는 것이다. 잔인하리만큼 힘들어도 천덕구니는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호미를 씻어 연장통에 넣어두고 하루를 마감한다. 고단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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