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날은 우수(憂愁)에 젖어 보는 것도 괜찮은 느낌이다

정삼열 | 2024.04.20 12:01
요즘은 해가 엄청길어지고 날이 일찍 새기에 9시면 조금 늦은 시간이지만 농사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그나마도 빠른 시간이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소식이 있고 특별히 예정된 일이 없어 좀 늦게까지 자리에 누워 있었다. 비가 그치면 풀을 뽑으려 작정했지만 좀처럼 그칠 비는 아닌 것 같다.

벌써 마당 잔디밭엔 잡초가 먼저 얼굴을 내밀고 있어 그것마저도 한 동안은 반가웠만 이젠 이놈들과 한동안은 씨름을 해야 한다. 밭을 일구면서도 틈틈히 잡초제거를 해야하기에 바빠질 전망이다. 한시라도 게으름을 피우다간 나중엔 포기할지도 모르기에 눈에 보이는 쪽쪽 제거해 주어야 하는데 먼저 걱정이 앞선다. 

농촌 일은 잡초와의 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년내내 잡초와 씨름하면서도 결국 이기질 못할 정도로 잡초의 생명력은 감당하기 어려운 데, 초기에 잡지 않으면 장마철엔 아예 포기할 정도로 곤란한 존재이다. 임업이나 목회도 마찮가지이다. 초기에 수형을 잡지 못하면 나중엔 수형이 잡히질 않는다. 주변엔 소나무 붐이 일어나 너도 나도 밭에 소나무를 심었지만 제대로 가꾸질 못해 거져 가져가라 해도 가져 갈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는 농가들이 많다. 

소나무는 제대로 가꾸질 못하면 쓰레기 취급을 당하고 애물단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목회도 초창기가 중요하다. 개척 초기의 구성원이 그 교회의 전통이되고 질을 형성한다. 가끔 후배들의 교회를 컨설팅해줄 때가 있는 데, 난 선임장로나 가장 유력한 교인 몇을 보면 그 교회의 장래를 예견할 수 있다. 초기에 잘못 세우면 나중엔 절대 고쳐지질 않는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자기 생각의 범주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걸 감안하면 초기에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고 복음적이고 신앙적인 훈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목회자들은 잘 알 것이다. 홀리팜에 있는 나무들에게서 난 이런 교훈을 실감하고 있다. 처음에 단추를 잘못 꿰면 나중엔 모두가 다 잘못된다.

나는 아직도 여린 딸들이라고 생각하지만 손주들을 키우는 모습을 보며 나보다 훨씬 잘 키우고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하곤 한다. 어릴 때 부터 얼마나 신앙적으로 잘 키우는지 고맙기만 하다. 어릴 때 아이들 기죽인다고 천방지축으로 키우면 나중엔 반드시 후회할 일이 생긴다. 아무리 신자가 아쉽다 해도 신앙적인 훈련과 제대로 된 영성을 길러 주어야 한다. 

나중으로 미루다가는 상투를 잡히기 십상이다. 그래서 나무를 매만질 때마다 가지치기를 철저히 해주고 가차없이 자르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아깝다고 미루면 나중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허우대만 멀쩡한 나무가 될뿐이다.    

농협에서 거름 백포를 구매해 놓았기에 먹은 것도 없이 배부른 기분이다. 오늘 비가 그치면 나무 한그루마다 한포씩 투척하려 한다. 역시 나무를 심고 난 후 거름을 주고 전지와 흙 다짐은 날이 좋아지면 하려고 준비해 놓았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이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게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지도 모른다. 농사를 지어 보아야 본전도 못건지고 건축 일을 틈틈히 하지만 속빈 강정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빈약하다. 하지만 내 능력이 그 정도밖에 되질 않기에 내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며 살려 노력한다. 

내 능력을 과대포장하며 거드름 피우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으려 작정했다. 능력이 50인 사람이 100의 자리에 앉아있으면 그 구성원들이 불행해지고, 자신도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되어 눈치보기에 급급해진다. 결국 그 모자라는 부분을 거짓이나 위선 그리고 아첨으로 채우게 되는 순간 결국 자기도 파괴되고 그 자리도 파탄될 수 밖에 없다. 

동양화가 서양화에 비하여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여백(餘白)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여백이야말로 창조적 공간이 되고 예술적 공간이 되는 것이다. 전체를 채우는게 아니라 약간의 공백을 두어 독자의 상상력에게 맡기는 기법이야말로 동양화의 진수(眞髓)였다.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얻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다.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부(富)나 높은 자리도 좋지만, 그 이전에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깜냥과 그릇을 잘 살펴, 무리하지 않고 그칠 줄 아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즉 자신의 분수(分數)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술꾼은 만취(漫醉)하는 법이 없다. 가장 기분좋게 술을 마시기 위해서는 '약간 알딸딸하다 싶을 때'나 '조금 아쉽다 싶을 때' 잔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때론 가지고 누리는 것이 그러지 않은 것만도 못 할 때가 많다. 논어의 선진편(先進篇)에 보면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이 있는 데, 정도를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뜻으로, 중용(中庸)이 중요함을 이르는 말이다. 때로는 아쉽다 싶을 때 자리에서 물러나고 여유(餘裕)로움을 찼는게 중요한 데, 능력도 안되는 사람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억척을 떨기에 초라해지는 것이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이다. 두 사람이 숲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시간 동안 도끼를 들고 나무를 찍는 작업을 했다. 한 사람은 점심 시간에 잠깐 20분 정도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부지런히 나무를 찍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적어도 네 차례 정도 넉넉히 쉬어 가며 일했다. 그런데 저녁이 되어 일을 끝낸 후 성과를 비교해 보니 네 번씩이나 쉬며 일한 사람이 더 많은 나무를 벤 것이다.

조금밖에 쉬지 않은 사람이 놀라면서 "아니, 당신은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쉬었는데 어째서 나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은 거지?"라고 물었다. 그러자 쉬어 가면서 일한 사람이 "나는 쉬면서 도끼를 다듬고 날을 세우고 있었다네. 그리고 나서 더 힘차게 이 나무를 찍었고, 자네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이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유(餘裕)는 낭비가 아니다. 여유는 성취를 돌아보고, 또 한 걸음 나아가서 우리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런데도 현대인들은 잠시의 여유도 없이 승승장구(乘勝長驅)라는 올무에 사로잡혀 자신을 학대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조급성(躁急性)은 끝내 모든걸 잃고 나서야 후회를 하게 만든다.

현대는 소위 실용주의적 가치관, 실용주의적 윤리관에 설득된 나머지 행동하는 시간, 움직이고 있는 시간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말의 여유도 없이 무리하게 뛰어다니고 있다. 남들이 모두 뛰는 데, 가만히 있으면 뒤쳐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가만히 있는 것은 시간 낭비이고, 시간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사실은 여유, 한가함, 이들이 더 위대한 창조의 전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북부시장에 나가 파 모종 한단을 구입했다. 일전에 포트로 심었지만 하우스 안에 뙤를 다 제거하지 못한 탓에 엄청나게 번져 파모종을 모두 뽑아 내고 다시 밭을 일구었다. 

이 잡초가 생기면 식물이 자랄 수 없을 정도이다. 뿌리가 얼마나 독종인지 잘라내도 이틀만 지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지독한 놈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부모님 산소도 이 뙤의 습격을 받아 잔디밭이 몇번 망가진 적이 있는데 '근사미'를 뿌리면 뿌리까지 죽일 수 있지만 그 대신 땅은 한동안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고질적인 녀석들이다. 밭을 갈아 엎고 호미로 뿌리를 모두 캐어 냈다. 최소한 30cm 정도까지 뿌리가 뻗혀 있어 한 뿌리를 캐려면 기진맥진해 질 정도이다. 하지만 비오는 날이라면 할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뿌리는 이런 날은 우수(憂愁)에 젖어드는 건 괜찮은 느낌이다. 한번쯤 무상을 느껴보고 사라지는 모든 것에 대한 슬픔 속에 흠뻑 젖어들어도 좋을 것이다. 가을에 꽃이 지는 줄 뻔히 알면서도 지는 꽃을 딱하게 여기는 마음, 그런 게 인생 아니던가? 비가 사람을 감성적으로 이끌어 가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비(雨)는 비(悲)를 위한 상관물이었던 것이다.사람들이 비에게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는 날은 맑은 날보다 비오는 날이 더 높은 확률을 차지한다고 한다. 전적으로 공감이 되는 말이다. 그래서 사랑을 고백하려거든 비 오는 날 하라고 했던가. 시간의 흐름을 독촉이라도 하는 듯. 이제 이 비가 그치면 녹음이 짙어지고 식물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것이다.

잠시 감성의 비를 맞으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 있어 그런대로 견딜만한 하루였다. 다행히 내복을 아직 벗지 않았기 망정이지 약간 쌀쌀한 날씨라 일하기에 좋은 기온이었다, 차가운 건 날씨뿐만이 아니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시하는 세상은 더없이 냉혹하고 차갑다. 이 사회는 머리만이 존재할 뿐 따뜻한 가슴이 끼어들 틈이 없다. 

보라. 온갖 종류의 부정과 비리, 사기와 속임수, 그 밑바탕에는 간교와 머리가 작용하고 있다. 심장은 그런 데 관여하지 않는다. 가슴은 그런 일에 관계하지 않는다. 사람을 뽑는 대학에서 머리만 중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머리의 회전만을 중요시하는 사회이기에 점점 살벌해 지는데 이런날 땅을 파며 흙을 매만지는게 나에겐 꽤나 의미있는 시간이다. 

어차피 나에게 남겨진 시간은 얼마되지 못하다는 걸 실감한다. 비행기 안에서도, 버스를 탔을 때에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별로 없음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아직 가슴은 뜨거운데 나에게 어르신 대접을 받던 사람들이 어느날 갑짜기 휴거(?)라도 한 것처럼 여겨질 때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에 수긍하겠지만 여백도 없이 살아 온 지난날이 아쉽기만 하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또 다시 혼자가 되는 순간 난 너른 마당을 바라보며 연산홍과 철쭉 그리고 오색도화가 만들어 낼 홀리팜의 여름을 기다리며 아직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챙겼다. 무궁화에 지지대를 설치해주는 일, 넝쿨 장미를 보강하는 걸로 일단 마감하고 하루를 마친다. 

스페인 포루투갈을 다녀 온 누이가 저녁을 먹자는데 9박 10일 긴 여행기간의 피로가 풀리지도 않았을텐데 한식이 먹고 싶은가 보다. 며칠동안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설명하고 이번주가 나에겐 정말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시간들이었다는 걸 호소했다. 동기간이 이런점에서 좋다. 있을 땐 표시가 안나도 없을 땐 빈자리가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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