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념아닌 체념이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정삼열 | 2024.04.17 09:54
이 동네에서 편히 살긴 다 글렀다. 어느 동네에 가던 촌노들 극성은 다 있기 마련이지만 이 동넨 더 유별난 것 같다. 

황등 시장에서 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고, 자주가는 내과에서 본 할머니도 있다. 바로 앞동네에서 사업을 하는 가스업체 사장이 동네 이장에게 전화하여 금번에 이사한 분은 함부로 대해선 안될 분이라며 각별히 조심하라고 귀띰을 했는지 여간 조심하는게 아니다.

어차피 한 오년 정도 살면서 서수면 문화마을 인근에 내 마지막 거처를 몇년에 걸쳐 만들려 조경부터 시작할 예정이지만 내 주변인들이 얼마나 뻥을 쳐놓았는지 대단한 부자인줄로 착각하여 운신하기가 어렵다. 

소문이 그렇게 났으니 결국 마을 행사 때마다 일명 찬조금 등을 내야할텐데 익산에서 소문난 부자라는데 몇십만원을 내고 생색내기가 어려워 곤란해졌다. 젊었을 땐 한인물 했을 거라는 소리에 어려워 말고 형님 누나하자고 손을 내미는데 입장이 곤란하다. 

시내에 나가면 날 '어르신'이라고 부르는데 이곳에서는 영계 취급을 받고 있으니 앞으로 동네 머슴으로 불려 다닐게 뻔하다. 동네 방귀 꽤나 뀌는 친구가 내가 이리고등학교 출신이란 말에 그 당시엔 수재들이 다닌 학교라고 치켜 세운다. 

이러다가 어느날 갑짜기 추락할게 뻔한데 올려놓고 흔들 생각인지 자꾸 풍선처럼 부풀려 놓는다. 하지만 일부러 피할 생각은 없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게 복중에 복이다. 데이브 패커드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신이 내리는 선물이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지속시키지 않는 것은 신의 선물을 내팽개치는 것이다'고 말했는 데, 과연 그렇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독불장군처럼 살 수는 없듯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베풀기도 하고 도움을 받기도 해야 하는 데, 난 내가 베픈 것보다 더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아온 것 같다. 인복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테크닉이 없다. 원론적인 말로 들릴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유일의 테크닉이랄 수 있겠다.

사교적인 태도와 현란한 언변은 '아는사람'을 많이 만들 수는 있지만 진정한 친구를 얻진 못한다. 그래서 법정스님은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말라며 '모든 사람과 해프게 인연을 맺어놓으면 자신의 삶이 침해를 당하고 그들에 의해 고통을 받는 순간이 올지 모르기에 진실은 진실한 사람에게만 투자하라. 대부분의 피해는 진실없는 사람에게 진실을 쏟은 댓가로 받는 벌이다'고 했다. 

그러나 진실이란게 추상적인 것이고 쉽게 판독이 되는 게 아니기에 만남에 대한 후회를 누구나 가지고 살아 간다. 고사성어에 보면 '맹구우목(盲龜遇木)'이란 말이 있는 데, 눈먼 거북이가 망망대해에서 100년에 한번씩 숨을 쉬기 위해 물위로 머리를 내밀 때, 때마침 구멍 뚫린 썩은 통나무가 있어 그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을 경우를 인연이 한번 도래한다고 한다.

또 지상에 바늘을 세워놓고 밀씨를 하늘에서 떨어뜨려서 꽂히게 하는 만큼이나 어렵게 다가오는 것이 인연이라고 한다. 나는 가능하면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얼굴붉히는 일은 하지 않느려고 노력했고, 아무리 더티한 사람이라 해도 칼로 무우를 베듯 하지 말자고 다짐을 하며 살아왔다.

요즘은 열받을 일이 산적되어 있다. 건축 준공검사가 석달이나 미루어져 건축설계사와 토목설계사를 닥달하며 이번주까지 준공검사를 받아내지 못하면 손해배상을 청구할 거라며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로 찾아가 허가계장에게 찾아가 읍소해서라도 결과물을 받아내라고 협박(?)했다. 

어차피 시간적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내가 준공을 의뢰한지 몇달이 지나도록 늦장을 부린게 원인이지만 이제 단 하루도 지체시키면 안되기에 민원인이 직접 나서려고 마음먹었다. 

건축을 하면서도, 그 너른 밭갈이를 하면서도 지칠줄 몰랐는데 조금만 신경썼더라면 아무 것도 아닌 걸로 결국 시간을 끌다 낭패를 당하게 만든 소위가 괘씸하여 얼굴을 붉히며 거친 말을 쏟아냈다. 그래봤자 이미 엎지러진 물인데 마음을 너그럽게 하자고 다짐하며 내일도 아침부터 건축설계사무소로 출근하려 마음먹고 돌아와 죽어라 땅을 팠다. 

요즘은 허기진 것 같기는한데 식욕이 없어 거의 굶식을 하고 있다. 다행히 전주 광주 친구들이 만들어 온 셀러드와 토마토가 있어 입맛을 다시지만 전혀 배고프단 생각이 안드는게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다가 건강에 이상이 생길지 모르지만 설마 그럴 것 같지는 않고 다시 의기소침한 기분을 떨쳐 버리고 내 특유의 끈기로 이 위기를 탈출해야겠다.   

나는 나의 몸관리에 너무 무심한 편이다. 친구들은 나에게 절대로 5월달까진 내복을 벗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나는 인명은 재천인 데, 갈 사람은 가는 것이라며 염려 붙들어 매라고 장담하지만 건강 문제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니 당뇨 혈압약을 신주단지 모시듯 가지고 다닌다. 물론 의사가 처방한 약을 복용하는 게 원칙이지만 나에게는 매일 복용하는 상비약 외에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을 복용하고 있기에 육신의 건강은 물론 영적으로도 건강해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내 또래의 사람들은 대게가 藥을 한웅큼씩 안먹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귀촌이후 내 몰골이 그 전만 못한게 사실이다. 하지만 '쭈그럼 밤송이 3년간다'는 말이 있듯 병약한 사람이 오히려 오래산다는 속설이 있고, '삐걱거리는 문이 고장없이 오히려 더 오래 간다'는 말을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에게 누누이 들어왔다. 연약하기에 조심하고 부족하기에 자만하지 말라는 지혜로 받아 들였다.

어차피 젊은이를 따라 갈 순 없을 것이고 내 능력의 한계를 잘 알기에 현실을 인정하며 조심 조심 사는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을 거라는 체념아닌 체념이 내 안에 자리잡기 시작했다. 젊은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려오고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 가슴이 서걱대는 건 나를 위해서도 좋은 현상은 아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몇 해 전 대한민국을 휩쓸고 지나간 베스트셀러 책이다. 힘들어하는 젊은 세대를 향해 ‘다 아프면서 크는 것’이란 다독임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몇 년 만에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오히려 따지고 든다. 청춘은 왜 꼭 아파야만 하느냐고 항변한다. 이처럼 요즘 젊은 세대는 도덕책에 나올 것 같은 격언에 거부감을 느낀다. 

꿈과 환상을 담은 이상적인 말도, 듣기 좋은 꽃노래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 탓이다. 대신 고구마 100개를 먹은 듯 답답한 속을 풀어주는 ‘사이다화법’으로 자신들의 속내를 이야기한다. 나는 '젊음은 돈 주고 살 수 없어도 젊은이는 헐값에 살 수 있다'는 말을 거부한다. 비록 젊은이를 헐값에 사려는 사회적인 인식이 팽배되어 가는 추세이긴 하지만 알바생이 건축 현장에 들어오면 최소한 1~2만원은 더 지불한다. 

젊다는 이유로 가장 허드레 일을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아르바이트생들이 ‘남의 집 귀한 자식’이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근무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을 받았다. 갑질을 떠는 못난 인생들이 정말 많은가 보다. 당신의 가족이 부당한 대우를 받을 수도 있다는 역지사지의 마음을 들게 하는 함축적인 문구였다. 

실제로 이 셔츠를 도입한 식당의 점주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무례한 손님이 70%로 줄었고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더이상 가진자들의 힁포를 그냥 놔두어서는 않된다. 땅콩 회향에서 부터 가진자들의 갑질이 젊은이들의 사기를 떨어트린다면 이 사회는 희망이 없다. 

사회를 이끌고 책임지는 이들이 청년세대에 해법을 주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기에, 이제는 나부터 ‘꼰대짓’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고구마를 심으려 정해놓은 하루의 분량만큼 땅을 파며 마음을 달래다 보니 조금은 분노가 조금 느긋해진다. 서산 너머로 사라지는 노을속에 한참 동안 빠져 들었다. 아둥바둥해 보아야 저렇게 기우러지는데 천년을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아가는 내가 한심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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