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기 부리는 것도 은사이던가?

정삼열 | 2024.02.11 09:12
주일예배를 드리고 오랫만에 목사님 내외와 점심식사를 마친 후 돌아오는 길에 이내 봄이 올 것만 같은 들녘으로 나갔다. 

아직은 쌀쌀한 날씨이긴 하지만 머지 않아 봄이 올 것만 같은 기운을 느꼈다. 

어릴 때 봄부터 가을까지 뛰놀던 만경강(萬頃江). 내 어린 시절 내 꿈을 키웠던 곳이고, 나를 아무지게 만들어 주었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나는 나이 들어서도 이곳에 서면 기필코 고향으로 찾아드는 연어처럼 추억을 불러 오는 곳이고 시름을 내려놓고 망중한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 만경강은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발원하여 북서부 일대를 흘러 익산시, 김제시, 옥구군 경계의 호남평야를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98킬로미터이다. 

이 지역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만경강이라면 생소하겠지만 호남의 젖줄이자 삶의 근간으로 이 땅의 역사를 주도한 곳이다. 만경강은 크게 전주천· 익산천·고산천이 삼례지역에서 합류하여 본류를 이루는 강인데 이들 지류가 각각의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 강의 역사를 형성하였다.   

만경강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짚어보면 그 한 줄기인 익산천은 고조선의 준왕이 바다를 통해 현재의 익산(금마) 일대로 피난하여 우리 역사에서 마한이 역사 정통성의 근간으로 자리잡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이는 근대 대한제국 명칭의 역사적 근거로서도 활용되었는데 그 뿌리에 만경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백제시대의 경우 만경강 줄기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 논의되고 있는 금마지역을 흘러 백제 무왕(서동)과 선화공주의 국경을 뛰어넘은 사랑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서동이 백제의 무왕으로 성장할 수 있는 경제적 부를 제공한 터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고구려가 망한 직후 고구려 부흥군들이 건국한 '보덕국(報德國)'이 금마에서 고구려 부흥의 마지막 꿈을 키우며 살았던 고구려 문화의 흔적을 이 강줄기에 남겼다.  

난 다섯살 때부터 이 강줄기에서 개헤염을 치면서 성장했고, 국민학교에 들어 갈 무렵엔 이 강을 헤염쳐 건너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었다. 한번도 제대로 수영을 배운적이 없었고 풀장 근처에 가본적이 없었지만 개헤험으로 100m는 됨직한 강폭을 오가며 현해탄을 건넌 조오련 흉내를 내곤 했었다.   

지천에 널린 말조개를 잡으려 다녔고, 메뚜기와 망둥어를 잡으려 하루종일 쏘다닌 곳이기에 늘 어머니의 품과같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봄이면 전주 군산간 도로변에 수만 그루의 벚꽃을 심어 벚꽃이 만발할 때는 아베크족들의 데이트 장소로 많이 이용하는 곳이며, 한 여름엔 아버지가 운전하는 자전거 뒤에 타고 강가에 나와 목욕을 하던 곳이기에 더욱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몇해 전 거동을 못하시는 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이 강가를 거닐며 어릴적 추억을 이야기 할 때 고개를 끄덕이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거의 실어 증세를 보이신 아버지는 주로 내가 수다를 떨며 지난 이야기를 끄집어 낼 때마다 깊은 한숨을 쉬며 눈방울이 젖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렇게도 강인하셨고, 평생 눈물을 보인 적이 없으신 분이 기력이 떨어지고 휠체어를 의지할 때 자주 우셨다.  

좀 젊었을 때는 내가 집에와서 이틀쯤되면 교회 비우지말라고 등떠밀던 분이셨고, 자식들이 보고 싶어도 보고 싶다는 말씀을 한번도 안하신 분이 말년에는 내 손을 꼭잡고 또 언제 올꺼냐며 기다리겠다는 말씀을 남겨 인생 무상을 느끼게 하는 허약함을 보이셨다. 나이드시면 자식들 중에 누군가가 곁에 꼭 있어 주어야 하는데, 난 그리하질 못했다.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나신 후 고향을 찾았지만 아버지와 함께 했던 그 기억만큼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여전하다. 지금도 가끔 아버지께서 세우시고 시무하셨던 예배당을 찾아 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강단을 주시하다 돌아오지만 교인이 얼마 없어 혹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 교회를 재구매하여 선친 기념교회로 만들어 봉헌하고 싶단 생각이 들곤한다.     

고향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확정짓고 서둘러 귀향했을 때 사실은 가진게 아무 것도 없었다. 월 30만원짜리 단칸방을 얻어 짐을 대충 정리해 놓고 인생2모작을 시작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선친의 재산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을 거라고 상상을 했지만 객지생활 40년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이미 소유권은 모두 남의 것이 되어 있었다. 농사를 짓고 싶어도 땅 한평도 남아 있질 않았다.  

첫해 남의 땅 30평쯤 빌려 고구마를 심었다. 일을 안해본 사람에겐 큰 땅이지만 욕심이 많은 나에겐 코딱지만하게 느껴지는 땅이었다. 다음 해엔 전재산을 투자하여 600평 땅을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집을 짓고 농사를 지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수지터널증후군, 일명 방아쇠증후군이 생겨 손가락이 마치 방아쇠를 당기듯 뚝뚝 소리가 나면서 펴지질 않아 고생 꽤나 했다. 그래도 귀촌학교에 입학하여 농사학을 배웠고, 인터넷을 뒤척거리며 열심히 배웠다. 

무던히 시행착오를 극복하며 농사꾼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 다음해엔 약간의 자신감이 생겨 750평의 땅을 구입하고 또 다시 집을 지고 정원을 꾸미기 시작했다. 농사일을 병행하면서 조경업자를 따라 다니며 배웠고, 나무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땐 솔직이 시간이 없어 친구를 만날 수도 없었고, 가족들이 있는 인천에 거의 올라가지 못했다. 할 일없이 노닥거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예전엔 관심조차 가져 본 적이 없는 하찮은 일이라도 배우려 노력했고 은퇴 후 소일거릴 즐기라는 사람들의 권유를 무시하고 일벌레처럼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살았다. 허리가 부실하여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오직 호미 한자루로 세상을 평정하겠다는 돈키호테 발상으로 무모할 정도로 살았다. 

그리고 그 다음해엔 이젠 어느정도 노하우가 생겨 집을 더 잘 만들고 정원을 더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 욕심이 생겨 다시 600평의 땅을 구입하고 황무지와 같은 땅을 개간하고 집을 짓고 일년내내 꾸몄다. 내 손이 안간 곳이 없을 정도로 나무나 꽃 한송이까지 직접 키워 만들어 나갔다. 그전까지만 해도 시중에서 꽃을 사다 장식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젠 야생에서 씨를 받아 포트에서 키워 옮겨 심는 재미에 푹빠졌고, 꽃을 키워 무상으로 나눠주는 재미에 월별의 꽃을 키웠다. 

꽃은 한 때 피고지는 거라는 걸 알았고 그래서 계절별 블럭을 만들어 년중 꽃이 피는 동산을 만들었다.  한겨울만 빼고 꽃을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자만이겠지만 이젠 일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진셈이다. 처음 내가 귀촌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몇달 후엔 못견디고 상경할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불과 몇년이 지난 지금은 내 존재감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신기(神氣)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나를 돕는 주님이 계시지만 그 전에 죽을만큼 일하고 배운다는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채근한다. 내가 귀촌하여 열번 이상 옮겨 다닌 이유는 넉넉한 자본금이 없기에 집을 짓고 정원을 가꿔 필요한 사람에게 넘겨주고 약간의 이익이 생기면 다시 새로운 곳을 찾는 방식으로 경험을 축적시켰고 생활고를 해결해야 했었다.    

집을 짓기 위해 수없이 답사를 하면서 한번도 비싼 땅을 구입해 본 적이 없다. 땅을 보는 안목이 남다른 건 아니지만 이 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를 철저히 한다. 그래서인지 이런 곳에 전원주택이 형성될 것인가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진 실패하지 않았고 의욕이 사그러지질 않았다. 

나는 할 일이 있을 때는 전혀 괴롭지가 않다. 차라리 할 일이 없을 때가 더 힘들었다.  악동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계속하니 역마살(驛馬煞)이 낀게 분명하다고 놀려대지만 나는 살(煞)을 믿지 않는다. 

남편을 잃는 살을 `청상살(靑裳煞)`이라 하고 문상이나 문병을 잘못 가서 부정과 질병의 우환이 생기다는 살은 `상문살(喪門煞)`이라 하며, 과부가 될 불길한 살을 `상부살(喪夫煞)`, 부부간에 사이가 나쁜 살을 `공방살(空房煞)`, 바람끼가 많은 사람을 `도화살(桃花煞)`이 끼었다고 하여 `살풀이`를 해 주어야 된다고 한다. 나는 어느 곳에 정착하던지 죽일 煞은 걱정하지 않는다. 땅의 기운도 믿지 않는다. 지인들이 땅의 수맥을 봐주겠다지만 그것도 믿지 않는다. 

나는 할 일없는 골방 늙은이가 되지 않고 내 앞에 일이 생겼다는 즐거움만 생각한다. 그간 얼만큼 손익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손익은 이 세상을 떠날 무렵 계산해 볼 생각이지만, 이 땅에 온 거만으로도 행운이었고, 좋은 부모를 둔 것과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순간에 날 붙잡아 천국으로 이끌어 주실 분이 계시니 행복한게 아닌가? 

내가 이 세상에 올 때 기저귀 한장 직접 가지고 온게 없다. 물론 부모님 은혜지만 최소 일년동안은 어머니 젖을 무상으로 빨았고, 어린시절 굶지 않고 살았으며, 지금도 처음 세상에 올 때보다 가진게 월등히 많다. 상대적 빈곤은 느끼지만 처음을 생각해 보면 나는 엄청난 축복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학창시절 수학점수가 낙제점 언저리를 맴돌았지만 지금도 남에게 줄 이자 날짜, 약간의 기부금 날짜 등을 정확히 기억하는 걸로 보아 아인스타인보다 못하단 생각을 해 본적이 없다.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수입이라고 해보아야 일이년에 딱 한번 정도이니 지출만 관리하면 된다. 아니, 안쓰면 그나마 걱정할게 없다. 수입을 탓할 필요가 없다. 지출을 줄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다행히 국민연금을 안들어 놓았고, 교단 년금도 없으니 수입때문에 머리 아플 이유가 없다. 살다보니 나라에서 노인년금을 주는가 본데 그게 큰 도움이 되는진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처음 내가 세상에 올 때보다 훨씬 가진게 많은데, 이만하면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주일 밤이 깊어 간다. 예전같으면 이 시간이 가장 여유롭고 마음이 편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목회자들에게 있어 주일 오후는 가장 육신적으로 힘든 시간인 반면, 마음은 날아 갈 듯 한가롭고 어디론가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시간이다. 

일반인들이 금요일 오후를 맞이하는 것과 같은 기분일게다. 습관이 되어서인지 아직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요즘은 주일 오후예배를 대게 오후 2시에 드리는 교회가 많아서인지 오후엔 친한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주일날 있었던 이야기부터 목회와 관련된 이야기 말고도 관심사를 공유하며 동병상련하는 기분이 되곤 했었다. 

그러나 요즘은 주일이면 불러낼 친구들이 곁에 없다. 자격지심인지는 모르지만 애써 만나자는 친구들에게 이런 저런 핑게를 대며 기피하다 보니 오해 아닌 오해를 사고 소원해진 관계가 형성되었다. 

내 스스로 초라하다는 생각을 하진 않지만 일부러 시간을 내어 교류할 여력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다. 그런 와중에도 꼭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여럿 있지만 그건 나중일이다.  

상추씨와 얼갈이 배추, 무우씨를 구입해왔지만 아직은 조금 이른 것 같아 조금 기다리기로 했다. 생각같아서는 몇일만에 상추를 키워 집들이를 하고 싶은데 아직 나에겐 그런 재주가 있질 못하다. 

이번주내에 친구들을 불러 삼겹살이라도 구워 자축하고 싶은데 달랑 밥그릇이 두개뿐이고 젓가락도 최소한 열벌은 있어야 하는데 손님을 초대해 놓고 아루바시를 사용하는 결례를 무릅써야 할 용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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