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무리 할 시간이 있슴에 감사합니다

정삼열 | 2024.01.20 09:17
난 아침에 집을 나올 때 가스불, 차 키, 집열쇠 등 나름대로 꼼꼼히 챙겨가지고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돌아서면 가물 가물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꼭 먹어야 하는 상용약 봉지를 문앞에 보관하고 있는데, 그마저 안가지고 나갈 때가 많다. 요즘들어 건망증이 심해졌는지 매일 실수투성이다.

언젠가 서울을 다녀어면서 차를 주차해 둔 곳이 기억나지 않아 한참이나 찾으러 다닌 적도 있다. 총명하기로 말하면 둘째 가라면 서운해 했는데 이젠 뭔가 하루 한가지씩 뭔가를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 불안하다. 하긴 망각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말이다.

문제는 잊지말아야 할 것은 잘 잊어버리고 잊어버려도 될 것은 오랫동안 기억으로 잠재되어 있어 사람을 괴롭게 한다는 사실이다. 건망증(Amnesia)을 유발하는 심리적인 요인은 불안, 초조, 우울, 만성 스트레스 등을 손꼽을 수 있으며, 기질적 요인은 알코올중독 등 여러가지 이유로 뇌세포 활동에 일시적인 장애가 생겨 발생하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나는 요즘 한 카톡 친구로 인하여 마음에 충격을 받았다. 아주 오래된 친구는 아니지만 독실한 크리스찬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어쩌다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는데 근래엔 자주 연락을 하지 못해 궁금하던 차 우연히 카톡을 열어 보니 "안부를 제 아이들에게 묻지 말아주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무리 할 시간이 있슴에 감사합니다"라는 맨트가 적혀 있고, 거의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업데이트 하곤 했는데 2개월 전에 멈추어진 상태였다. 

자녀들 연락처도 모르지만 안부를 아이들에게 묻지 말아 달라는데 무슨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 수소문해 보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2개월 전에 소천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지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긴 했지만 오히려 담담하게 급사하지 않고 "마무리 할 시간이 있슴에 감사"한다는 말과 슬퍼할 아이들을 걱정하는 모습에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잊어 달라는 요청같기도 하지만 잊혀지지 않을 거 같은 그 마지막의 의미는 세상을 향한 초연함과 장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육의 종말이었다. 육신의 고통스러움이 얼마나 컸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의식불명의 상태나 치매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혼미한 상태가 아니라 마무리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을 감사하는 그 믿음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나도 '마무리 할 시간'이 꼭 있었으면 좋겠다. 마지막까지 정신이 또렷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아직 치매는 아닌 것 같아 그나마 위안이 된다. 건망증과 치매증세 초기의 경우 딱 구분하기 어려우나 자신의 기억력이 감퇴된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치매에 해당되고 기억력 상실을 의식하는 것은 건망증으로 분류한다는데, 건망증(Amnesia)은 단기 기억 장애 혹은 뇌의 일시적 검색능력 장애로 정의할 수 있다.

시간·공간적인 맥락에서 과거와 현재를 있는 고리인 기억현상에 차질이 생긴 것이지만 개선이 가능한 반면 치매는 단기 기억뿐 아니라 기억력 전체가 심각하게 손상됨은 물론 판단력과 언어능력, 작업능력도 현격히 떨어지게 된다고 한다. 

난 지금도 메모하는 습관이 있지만 현역 시절, 목회 다이어리에 깨알같은 글씨로 하루 스케줄을 메모하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다. 심방 일정은 물론 사소한 약속까지도 반드시 메모하는 습관이 되어 건망증과는 상관없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다이어리가 사라지고 나서 부터는 돌아서면 잊어 버리는 것이 많아 걱정이다. 

지금도 중요한 일정은 월력에 표시하긴 하지만 월력을 안볼 때가 많아 약속을 잊기도 한다. 다른 건 몰라도 상비약을 챙겨 먹는 일은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잘 안된다. 하긴 藥 하루 안먹었다고 큰 일나는 것도 아닌데, 그게 뭐가 대순가? 어떤 땐 내가 누군지를 잃어버리고 살 때도 있는데 말이다. 

오늘만 해도 인부들을 현장에 투입하기 위하여 꼭두새벽에 시내로 나갔는데 비가 부슬 부슬 내려 지붕 물받이 공사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왕 출근했는데 놀리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일당을 챙겨주려 공사를 강행했다. 아닌게 아니라 물받이 두개 정도를 설치하고 비를 피하여 비닐 하우스 안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도저히 그칠 비가 아님을 직감하고 오전만 근무하고 돌려 보내려다가 하우스 안에 텃밭을 미리 만들기로 하고 남은 판넬로 고양이 집을 짓도록 했다. 

실내 인테리어하는 목수 오야지는 비가 내려  일을 못할 경우엔 일당을 안줘도 되는게 불문률이라지만 돈벌려고 이국만리를 찾아 온 이들을 실망시키면 안된다는 똥고집을 부리며 애써 목수들 말을 씹어 버렸다. 돈이 넘치는가 보다는 조롱을 받겠지만 사람이 그러는게 아니다. 

나이 80을 넘긴 자린고비 영감이 있었다. 그 주머니에 돈이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은 많지만 나오는 걸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근검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하도 인색하단 소문을 들은 지인이 '그렇게 돈을 아껴 뭐하려느냐'는 질문에 '이 다음에 늙으면 쓰려 한다'며 아주 자연스럽게 대답하더란다. 나이 80인데 다음에 늙어서 쓰려고 돈을 모은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왠만해야지, 요즘은 죽는 사람이 없다. 장례식장을 경영하는 친동생이 "요즘은 장례식장에 노인네들은 없고 젊은 사람이 대부분이라"며 사고사가 아니면 죽을 생각을 안하는 모양이라며 볼멘 소릴 한다. 그러니 나이 80인데도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게 아니겠는가. 

내 지난날을 반추해 보면 나도 전엔 먹는 즐거움이 세상에서 제일 큰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무진장 먹어 치웠다. 마음놓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소고기 부페에 가서 1kg정도는 먹어야 먹은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지금은 고기 먹자는 사람 곁엔 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식성이 변했다. 

도대체 배가 고프질 않은 걸 보니 병이 아닌가 싶지만 다른 사람이 평생을 먹어야 할만큼 젊은 시절 다 먹었기에 지금 식탐이 줄어든게 당연지사일 것이다. 요즘은 마트에서 다꾸앙(단무지)를 사다 먹는데 단무지 값이 이렇게 비싼지를 처음 알았다. 김밥용으로 가느다랗게 썰어 포장한 열개들이가 3천원이라는데 김밥 한줄에 다꾸앙이 3백원어치가 들어 간다는 말이다. 살인적인 물가이다. 

미국 코넬대에서 이뤄진 조사다.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 모두에서 후회를 한다고 한다. 그런데 저질러서 후회하는 일과 저지르지 않아서 후회하는 일 중에 어떤 것을 더 많이 생각하는지를 알아본 결과, 60.5%가 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답했다. 즉 뭔가 하지 않아서 후회스러운 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반추하게 되는 거다.

전에는 먹는 즐거움이 엄청 크다는 걸 느꼈지만 지금은 삶의 한 과정 정도라고 느끼기에 예전의 왕성한 식욕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냉수에 밥말아 먹으면 간편하고 편하게 먹을 수 있고, 금방 부자가 될 거 같은 기분이 든다. 햇반 600원짜리 하나면 한끼로 족한데, 누군가 그렇게 절약해서 어디에 쓰려느냐 묻는다면 이 다음에 늙어서 쓰련다고 대답하려 마음먹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마무리 할 시간이 있슴에 감사합니다"라는 카톡 문자에 마음이 시리고, 평소에 더 살갑게 대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워 우울모드에 빠져 들었다. 이 다음 늙어서 잘 살려고 돈을 번다는 나이 80된 노인과 내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지 말아 달라는 당부가 묘하게 클로즈업되면서 슬픈 비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twitter facebook me2day 요즘
독자의견
rss
연안부두
차오프라야 강(Chao Phraya River)가 에서 처음 대했던 두리 new
날짜 : 2024.05.20 12:04 / 댓글 : 0  
    
오늘은 절기상 만물이 생장하고 가득 찬다는 소만(小滿)이다. 입하와 망종 사이에 ..
'촌놈 마라톤'하듯 죽어라 뛰고 보는 군상들
날짜 : 2024.05.19 10:58 / 댓글 : 0  
    
간밤에 어깨 통증때문에 고생했다. 며칠 동안 건축 현장에서 철근을 결속선으로 묶는 작업을 ..
임을 위한 행진곡
날짜 : 2024.05.18 11:39 / 댓글 : 0  
    
오늘이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五一八光州民主化運動) 혹은 ..
몸은 하나인데 할일이 너무 많다.
날짜 : 2024.05.17 11:11 / 댓글 : 0  
    
요즘 신종어인 '호모 사피엔스(Home Sapiens)'에 비유해 스마트폰에 의해 삶이 변..
내 생각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날짜 : 2024.05.16 11:25 / 댓글 : 0  
    
출근길에 지나는 마을 입구에는 수 백년 된 느티나무가 속을 비운채로 서 있는 걸 본다. 텅..
복숭아나무와 오얏나무 밑에는 절로 오솔길이 생긴다
날짜 : 2024.05.15 09:10 / 댓글 : 0  
    
"작위불의태성 태성즉위(爵位不宜太盛 太盛則危) 능사불의진필 진필즉쇠(能事不宜盡畢 ..
사람이 일이 있을 때가 행복하다
날짜 : 2024.05.14 10:50 / 댓글 : 0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너희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내가 할 수 있는 한계가 아직은 아니다.
날짜 : 2024.05.13 10:45 / 댓글 : 0  
    
새벽에 출근하여 집에 돌아와 두시간 하우스에 물을 주고 풀과의 전쟁을 벌렸다. 사실 풀을 ..
식은 커피가 더 달다.
날짜 : 2024.05.12 10:18 / 댓글 : 0  
    
나는 참으로 어벙한 사람이다. 어벙이란 말은 '똑똑하지 못하고 멍청하다'는 뜻인데, 멍청하..
한평생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들을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
날짜 : 2024.05.11 09:55 / 댓글 : 0  
    
새벽에 집을 나설 때 눈부신 태양을 보며 출근했는데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날이 흐려지고 금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