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Blue Christmas

정삼열 | 2023.12.25 10:29
예전의 12월의 낭만이 그리웁다. 성탄절 준비로 떠들썩하던 고사리 동무들도 보고 싶다. 그 때 성탄절을 준비했던 아이들이 지금의 한국교회를 지키고 있는데 이젠 교회 학교가 없는 교회가 50%를 상회 한다고 한다. 

큰교회도 교회학교는 심각할 정도로 침체되어 있다. 틀림없이 10년 안에 한국교회는 중대한 고비를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일반 사회적인 현상이라고 하기엔 너무 심각하다.

한국교회가 지금이라도 재를 뒤집어 쓰고 통회 자복하지 않으면 위기는 가속될게 뻔하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듯 말이다. 바벨론 강가에서 눈물을 지으며 지난날을 추억했던 포로 시절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답습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옛날을 추억하며 슬픈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다. 

나일먹으면 추억에 산다고 한다. 물론 추억이 아름답긴 하지만 모든걸 기억하고픈 건 아니다. 때로는 너무 힘든 시기도 있었고, 아픈 기억들이 존재한다. 근육질은 아니었어도 오동통한 젊은 시절의 앨범을 꺼내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지금은 근육대신 지방만 남아 깊게 패인 주름이 흉물스럽기만 하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추억에 잠기는 일이 자주 있다보니 나도 이제 늙는가 보다. 

나일 먹었다는 건 들숨보다 날숨이 길어지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에너지를 얻는 데 필요한 산소는 들숨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다. 들숨을 통해 몸속으로 들어온 산소는 혈액을 통해 조직 세포로 이동하여 영양소를 분해해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날숨으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호흡이라고 한다. 그래서 날숨은 들숨보다 이산화탄소가 많고, 산소는 적게 포함되어 있다. 

들숨과 날숨은 같은 길이여야 한다고 한다. 아마도 호흡의 길이는 비슷하겠지만 날숨이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산화탄소가 많아서가 아니다. 한숨 고뇌 실패에 대한 처절함 등으로 내 쉬는 숨엔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탄식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면 자꾸 추억에 잠겨 어릴적 이야기를 자주 하다보니 서로가 주고받는 말들이다.  

나는 가끔 추억이 깃든 골목길에 가서 서성거릴 때가 많다. 성탄절임에도 전야예배도 드리지 않는 교회가 부지기수이다. 너무 썰렁하다. 요즘은 전야 행사를 안하는 교회가 많아진 것 같다. 5~60년전 내가 뛰놀던 그 골목길. 12월 24일 밤이면 온 동네 아이들이 모두 예배당으로 몰려 들었다. 일년에 딱 한번. 그 날만큼은 목사의 아들이라는게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구호 물자의 영향도 대단했지만 먹거리가 풍족했고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좋았다.  

교회 안다니는 동네 주정뱅이들 까지도 이 날만큼은 교회에 가는 날이기도 했다. 한달 전부터 연습을 했지만 실수를 연발하며 동방박사의 수염이 떨어지는 바람에 무대에서 그만 울음을 터트린 창식이 놈의 천진스런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국민학생은 새벽송에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지만 코를 훌쩍거리며 밤새도록 새벽송을 따라 나섰던 단발머리 한덕자도 칠십을 넘겼을테고, 당시 중학생 형들은 이미 70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나는 현역에서 떠나기 직전까지 새벽송을 직접 돌았다. '저들밖에 한밤중에 양틈에 자던 목자들' 아파트 특성상 울림이 심하기에 까치발로 드나들며 최고로 고운 목소리를 찬송을 불러주고 대문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해주었다. 올 한해를 지켜주신 주님의 은혜와 내년에도 이 문을 통해 禍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간절히 기도해 주면 교인들은 퍽이나 좋아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전교인 집을 거의 다 돌아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성탄 행사나 새벽송을 나가는 교회들이 거의 사라졌다. 주변의 반대도 심하지만 교회도 동력을 잃은지 오래이다. 대강절이 시작되었어도 '대강' 지나 버리는게 추세이다. 성탄 츄리가 문제가 아니지만 츄리를 만드는 교회도 눈에 띄질 않고, 거리를 나가 보아도 캐롤송이 울려 퍼지질 않는다.  

어제 성탄 전야(前夜)가 너무 썰렁하단 보도를 보았다. 이러다간 성탄절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이스라엘이 불레셋 땅 가자지역을 폭격하는 바람에 70명이 죽었다는 보도가 성탄절을 어지럽혔고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이 썰렁하단다. 평화의 왕이 오셨는데 그 땅에 살륙이 벌어지고 있으니 아이러니하다.

어젯밤엔 유튜브를 통해 성화를 관람하는 하는 것으로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냈지만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임이 없는 시대는 죽은 시대이다. 점점 우리 가슴속에 설레임이 사라지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의 가슴을 설래게 하던 성탄절이 실종되어 버렸다. 시내 곳곳에 울려 퍼져야 할 캐롤송이 들리지 않고, 그 흔하던 크리스마스 츄리도 보이질 않는다. 

올핸 자선냄비도 보이질 않는다. 매년 그런 추세이지만 올해는 더 부침(浮沈)이 심한 것 같다. 성탄절의 실종은 시대적인 상황이기도 하지만 목회자 자신들이 만든 자업자득이다. 일반 교인들 중에 성탄절은 알지만 대림절(待臨節, The Advent)을 물어보면 과연 몇명이나 알고 있을까? 성탄절을  앞두고 언젠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초를 밝히자는 ‘기다림 초’를 성탄절을 앞둔 4주전 부터 켜기 시작한다.   

대림절은 ‘겨울의 사순절’로 통할 만큼 크리스천에게는 의미가 크다. 대림절은 ‘옴’, ‘도착’을 의미하는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된 말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미리 기대하며 자신을 가다듬는 것을 그 본질로 하는, 성탄절 전 네 주일을 포함한 절기이며 대강절(待降節)이나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부른다. 

중대한 사건이나 기대되는 즐거운 일을 준비하며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생애의 서막인 성탄절을 미리 준비하여 자신을 가다듬는 절기이다. 그러나 대림절을 준비하는 교회가 거의없다. 아예 대림절이 무엇인지 모르는 목회자들도 허다하다. 말하자면 성탄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성탄절 감사헌금만 챙기려는 교회들이 많다. 

성경에 보면 주의 오심을 기다린 사람이 여럿이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말라기와 세례요한이 그들이다. 말라기선지자는 특정한 때, 결정적인 때가 되면 야훼의 사자를 보내겠다고 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그 특사의 역할을 하였다. 말라기는 “내가 너희를 심판하러 가겠다. 점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와,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와,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겠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말라기 3:5>고 했다. 

또한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들에게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에게는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군인들에게는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요한이 요구한 것은 특별히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상에서 자기의 본분을 지키면서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던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즐거운 축제의 성탄절이 올해도 어김없이 지나고 있다. 회상해 보면 어린 시절에 보냈던 성탄절은 기대와 흥분 그 자체였다. 그런데 요새는 왠지 옛날과 같은 감흥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오래 전 성탄절은 감격과 환희의 날이었다. 이 날은 교회 다니는 사람이건 교회와 거리가 먼 사람이건 일년 중 가정 즐겁고 신나는 날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이들에게 즐거운 성탄절(Merry Christmas)이었다. 신앙의 연륜이 있는 성도들이라면 그 시절 성탄절의 즐거운 추억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시절에 주고받았던 성탄절 카드엔 산타할아버지 그림도 있었고, 루돌프 사슴도 있었지만, 누가 뭐래도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셨다. 

동방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모습도 있었고,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는 요셉과 마리아의 그림도 생각이 난다. 아닌게 아니라 성탄절 세속화의 역사는 성탄절 카드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성탄절 카드에 예수님이 엑스트라가 되시더니, 몇 해 전부터 성탄절 카드에 아예 예수님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에 엽기 토끼, 엽기 돼지, 엽기 고양이, 쥐, 펭귄들이 가득히 그려져 있다. 

그리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성탄절 메시지도 성탄절 카드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우스개 비어, 속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에 감사해야 할 성탄절이 웃기는 날, 엽기적인 날로 변해 버린 것이다. 이런 성탄절에 대한 아스라한 감흥과 기억들이 사라진지 오래다. 과거에 성탄절에만 볼 수 있었던 일들이 이제는 일상화 되었다. 

예전엔 통행금지라는게 있었지만 성탄절 전야엔 통행금지를 해제했다. 하지만 이것도 의미가 없어졌다. 통금 자체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새벽송도 사라졌다. 복잡한 도시 공간속에서 새벽의 합창은 소음으로 취급되어 시비거리가 되기 일쑤다. 성탄절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도 이제는 신이 안 난다. 그때는 색종이, 금종이, 은종이 사다 오리고 붙이고 매달고 했는데 이제는 가짜 나무에 걸 장식들이 정교하고 하려하고 다양하게 제품화되어 있어서 사다가 걸기만 하면 된다. 

편리해지기는 했지만 정성이 없는 성탄장식이 되고 말았다.  스칸디나비아 어느 산골에서 나왔다는 정체를 모르는 전설의 주인공이 성탄절의 추억을 만들어 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성탄절에 대한 모독이며, 비역사적인 해석이다. 현대인들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 장식이나 카드 가운데 이런 것을 본 일이 있는가? 

아기 예수가 말구유에 누워있고, 마리아와 요셉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다. 허름한 마굿간 지붕 위에는 눈이 덮여 있다. 낙타 등을 타고 예수께 경배하러 가는 동방박사들. 하늘의 밝은 별이 그들을 인도한다. 환하게 빛나는 별 아래로 전나무 숲이 펼쳐진다.(가끔은 설원 위로 낙타가 남긴 발자국이 보이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예수가 태어난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은 지중해성 기후다.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비교적 서늘하지만 밤에도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는경우는 거의 없다. 이 지역은 겨울철이 우기이고, 연평균 강수량의 70퍼센트 이상이 11월과 1월 사이에 집중된다.  따라서 예수의 탄생 배경에 더 충실하려면, 침엽수인 전나무보다는 올리브나무가, 눈보다는 비가 더 적합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몇년전 성탄절 무렵 필리핀 마닐라를 여행할 때 보니 일년 열두달이 여름인 나라에서 '흰눈사이로 썰매를 타고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는 캐롤송이 거리마다 흘러 넘치고 있었다.  성탄절은 불행한 인류의 소망이자, 평화와 기쁨을 던져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하는 날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겸손을 배우는 날이다. 요즈음 어린이들이 장성하면 훗날 성탄절에 대해 무엇을 기억할까?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저려올까? 성탄절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 동화, 소설들이 전해지고 있었고, 그 내용도 회개와 용서와 사랑과 희생과 나눔과 행복이 대부분이었다. 유명한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님의 회심 이야기인 찰스 디킨즈의 「크리스마스캐럴」, 지독히 가난한 젊은 부부의 눈물 어린 성탄 선물에 담긴 사랑을 그린 오헨리의 「크리스마스 선물」,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러 떠난 순례길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였던 「넷째왕의 전설」, 가난한 성냥팔이 소녀의 가슴 아린 이야기를 담은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등 성탄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나 있을까. 

사돈네 팔촌이 온다고 기별오면 청소하고 부산떨면서 예수의 오심을 이렇게 홀대하고서야 어찌 교회라 할 수 있겠는가. 올해도 게을러빠진 것들이 카톡으로 성탄카드를 대신할게 뻔하다. 출처도 모르는 그림이나 동영상을 퍼다가 나를 생각말고 주의 대림을 고대하며 카드 한장이라도 직접 그려 교인들에게 보내주면 그 진정성이 성도의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성탄절이 흥청망청하는 건 안되겠지만 지금처럼 불꺼진 성탄절을 만든 원인이 무엇인가. 예전엔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성탄 전야엔 예배당에 나오곤 했다. 성탄절에 빵이나 떡을 얻어먹었던 그 추억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형성했다. 생일날 이웃에게 떡돌리던 아름다운 풍속이 사라지고 문닫고 지들끼리만 먹으면 생일의 의미가 무엇인가. 

예전엔 똘이에미 생일이 초닷새라는 걸 동네 사람이 다 알고 지냈었다. 영광댁 생일은 초엿새고, 순천댁은 아마 보름지나고 다음날이었지? 우리의 마음속 잊혀져 가고 있는 선량함과 용서와 사랑의 감정을 다시 조용히 그리고 살며시 되살려 준다. 인생을 살아놓고 지난날을 돌아보면 힘들고 고생했던 날들이 더 추억으로 남는다. 

작은 기쁨을 오래 기억나게 하는 가난했던 시절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게 풍요에 젖어 소중한 추억을 잊어버리지 말고 작은 것에 감격하던 순수한 마음으로 성탄을 보내고 싶다. 교회에서 전교인들에게 나눠준 푸짐한 가래 떡과 커피로 크리스마스의 밤을 보내고 있다. 영롱한 별이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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