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달 긴긴밤

정삼열 | 2023.12.22 15:04
동짓날이다. 24절후의 22번째 절기로 일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 동지는 과거에 '작은 설'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한 날 중 하나였다. 

추분을 지나 낮이 한없이 짧아져 눈깜박하면 해가 저물곤 했는 데, 이제 내일부터는 낮이 점점 길어질 것이다. 

동짓날을 기점으로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때문에 우리 조상들은 동지를 '태양이 부활하는 날'로 여기고, 동지가 음력 초순에 들면 애동지(兒冬至),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하순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일컫는다. 

동짓달 긴긴밤이라더니 요즘은 늦게 잠들면서도 한밤중 두세번씩 깨는 통에 신체 리듬이 깨어져 버렸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내 주변사람들중 7~80%는 자다가 한두번씩 깨어 난다 해서 약간 안심이 되었지만 나일먹으면 前立腺에 제일 먼저 이상이 오는가 보다. 

만약 새벽기도를 정기적으로 해야 한다면 큰 일이었을텐 데, 인천과 군산에 계신 두담임목사가 나를 위해 매일 새벽기도를 대신하고 계실줄 믿어 아예 맡겨두고 늦게까지 잘 수 있어 걱정은 안되지만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관계로 낮엔 늘 피곤함을 느낀다. 사람은 밤에 숙면을 잘해야 건강하다는 데, 이런 습관이 든지가 오래이다. 

친구중에 한녀석은 한밤중에 깨어나면 테라스로 나가 골프채를 30분쯤 휘두른다고 자랑하는 데, 그거야말로 흉물스럽다. 한녀석은 자다가 깨면 한게임에 들어가 고스돕을 두어 시간씩 한다는 데, 인터넷상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땐 고스돕 솜씨가 운삼기칠(運三技七)에 불과할텐 데, 매일 털리면서 딴다고 큰소릴 친다.     

우리 동네도 새벽 4시면 불켜진 집들이 제법 많다. 前立腺에 이상이 생긴 노인네들이다 보니 이해가 간다. 수면상태에 빠지면 거의 송장처럼 밤을 보내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잠안오는 건 정말 곤혹스럽다. 동짓달 기나긴 밤이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낮이 얼마나 짧은지 아침에 일어나 짐승들 먹이를 주고 컴컴할 때 공사현장으로 출근하여 모닥불을 켜놓고 인부들을 기다리다 커피 한잔으로 아침식사를 대용하고 일하다 보면 금방 점심 시간이고, 어영부영하다 보면 금방 해가 서산마루에 걸린다. 낮이 일년 중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날로 북반구에서는 태양의 높이가 일년 중 가장 낮아지는 때이다. 

예로부터 동지에는 역귀를 쫒기 위해서 팥죽을 쒀먹었다. 우리나라에는 붉은 색을 띠고 있어 역귀뿐만 아니라 집안의 잡귀를 물리친다고 먹기도 하고, 대문이나 담벼락 등에 뿌리기도 하는 풍습이 전해져 오고 있다. 중국의 ‘형초세시기’에는 팥죽에 관한 설화가 있다. 공공씨에게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 전염병을 퍼뜨리는 귀신이 됐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해 팥죽을 쑤어 물리쳤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영조 임금이 ‘귀신을 쫓는다며 문에다 팥죽을 뿌리는 공공씨의 이야기는 정도에 어긋나는 것이니 잘못된 풍속을 바로잡으라’는 기록이 있지만 귀신을 쫓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속담에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말이 있어, 하나의 나이를 먹는 통과의례처럼 자연스럽게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먹는 것이 대중화가 되었다. 

액땜 때문에 팥죽을 먹는 세시풍습의 영향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조상들의 지혜도 담겨 있다. 팥은 영약학적인 측면에서도 훌륭한 건강 식품이다. 팥에는 비타민 B1이 풍부해 무기력증, 피로감을 줄여주기 때문에 직장인이나 수험생들에게 도움되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동맥경화도 예방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팥에는 사포닌과 칼륨도 들어 있는데 사포닌은 요즘처럼 추운 날씨에 면역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고, 칼륨은 염분을 많이 섭취해 생긴 부기를 빼주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 

또 팥은 포만감이 높은 음식이기에 다른 계절에 비해 움직임이 줄어드는 겨울에 과식하는 걸 막아줘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니 팥죽이야말로 나에게 꼭 필요한 식품이다. 이 동짓날 팥죽을 생각하면서 구약성서의 출애굽기12장에 나오는 유월절을 연상하게 된다. 집 좌우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 애굽의 장자들을 치며 재앙을 넘어가게 했던 이스라엘의 유월절 규례가 입과 입으로 구전되어 긴시간 동안에 실크로드를 거쳐서 우리나라에까지 건너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말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어떤 이들은 확신을 가지고 동지팥죽의 붉은 색이 액을 물리친다고 하여 대문이나 벽에 뿌렸던 풍습이 생긴 것은 이런 연유라고 억측을 부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유월절 절기에 팥죽을 뿌려야지 왜 하필 동짓날 뿌리는가? 물론 심정적으로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이있어서이겠지만 왜 그리도 근거도 없는 억측을 하는가는 하면 아마도 정체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민족이라는 생각이 성경에 근원을 연결시켜 보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동짓날에 천지신과 조상의 영을 제사하고 신하의 조하(朝賀)를 받고 군신의 연예를 받기도 하였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동짓날을 ‘아세 (亞歲)’라 했고, 민간에서는 흔히 ‘작은 설’이라 하였다고 한다. 

겨울이 시작되면서(입동) 온갖 벌레들이 다 땅속에 숨어들어 긴 잠을 청한다. 소설(小雪)의 눈보라와 대설(大雪)의 큰 눈을 맞으면서 점점 세상은 추위와 어둠으로 깊어져서 마침내 밤이 가장 긴 동지에 이른다. 

동지는 하지의 대칭점이다. 조선시대의 황진이가 동짓날 긴긴밤의 한 허리를 잘라내었다고 해서 동짓날 밤이 짧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각기 동짓날의 긴 밤을 잘라내어 붙이고 싶었던 소중한 날들을 회상하게 되면서 밤은 더욱 길게 느껴지게 된다. 밤의 길이와 더불어 자신의 내면의식의 발견 또한 심화된다. 그러나 동지 또한 일음일양지위도(一 陰一陽之謂道)의 이치에 따라 양의 기운으로 선회하는 출발점이 된다. 음의 기운이 음의 기운에 막히어 양으로 선회하는 지점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인식하기도 했다. 긴 밤은 역설적으로 낮을 불러오는 동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어릴적 동짓날은 내겐 축제와 같은 날이었다. 한창 성장할 땐 ‘밥 먹던 수저를 놓고 돌아만 앉아도 배가 또 고프다’고 했던가. 밤이 깊어지면 아까 먹었던 팥죽이 벌써 소화가 되었는지 슬슬 야참 생각이 난다. 

그러면 오늘 팥죽을 썼던 집을 하나하나 열거해 나간다. 누구네 집은 어떻고, 누구네 집은 안 되고. 오늘은 누구네 집으로 가자. 이렇게 모의가 끝나면 우리가 지정한 집의 장독대를 뒤진다. 역시 거기에는 한 양판의 팥죽이 적당히 식어 있다. 팥죽은 따스할 때보다 식었을 때가 맛이 있다. 얼음에 살짝 얼었을 때 먹는 팥죽이 더 맛이 있다. 그래서인지 팥죽은 동치미나 백김치로 먹어야 제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부억을 들랑달랑하면서 한숟가락씩 퍼먹던 그 맛은 지금은 흉내 낼 수 없는 추억의 음식이 되어 버렸다. 여름철이라면 불가능했겠지만 동짓날이기에 가능했다. 난 체질적으로 뜨거운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밥도 된밥에 식은 밥이 더 좋다. 방금 밥을 했으면서도 찬밥이 남아 있으면 먼저 찬밥을 먹는다. 

나는 볶음밥을 좋아하는 데, 막 지은 밥으로는 맛있는 볶음밥을 절대 만들 수 없다. 냉장고 구석에 굴러다니던 수분 빠진 찬밥이라야 진짜 볶음밥의 소중한 재료로 변신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갓 지은 밥은 전분이 막 호화(糊化)된 상태여서 젤리처럼 진득하고 수분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슬고슬한 건조함이 중요한 맛있는 볶음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버려지고 잊혀진 못난 존재의 쓸모를 발견하는 눈을 가지고 있다. 팔다 남은, 먹다 남은 음식이 더 맛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것도 그런 면모다. 기다려야 진짜 맛을 보여주는 건 꼭 요리만은 아닐 것이다. 경험되어진 모든 일들도 곱씹어 보면 모두가 소중한 것들이 된다.

매일밤 눈이 내리니 누이가 팥죽도 못얻어 먹은줄 알고 팥죽먹으러 오라고 호출하지만 이미 서울을 거쳐 인천에 와 있기에 팥죽관 비교할 수 없는 임금님 수랏상 부럽지 않은 진수성찬을 즐기고 있다고 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내일 방문할테니 내 묷을 남겨두라고 당부했다. 특별한 맛이 있어서가 아니라 추억의 음식이기에 애써 추억을 소환해 보고 싶은 생각이 크기 때문이다.

익산도 만만치 않지만 서울은 정말 춥다. 아니, 전국이 꽁꽁 얼어붙었다. 대게는 소한을 지나 대한으로 가는 시기가 가장 춥다고 알려졌지만 요즘은 날씨를 종잡을 수가 없다. 매일 밤마다 눈이 내려 발목을 붙는통에 신축공사를 시작하지 못해 초조한 마음이지만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일단 숨고르기를 하기로 했다. 

아침엔 눈이 녹지 않아 거북이 걸음으로 익산역으로 갔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걱정이 되어 지인들에게 수시로 눈이 녹았는지를 확인했는데 괜찮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막상 익산역에 도착하니 또 다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얼마나 내릴진 모르지만 일주일 내내 밤에만 게릴라성 눈이 내리니 시름이 깊어지지만 겨울아니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라 그런대로 수용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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