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건너 폭설이 내리는 겨울밤

정삼열 | 2023.12.21 09:50
간밤에 또다시 큰 눈이 내렸다. 밖을 내다 보니 오늘도 차를 몰고 나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어 이른 점심으로 칼국수를 끓여 먹고 저녁은 김치찌게를 해먹으며 구들장 신세를 지기로 했다. 

벌써 2주 가까히 혹독한 추위는 물론 밤새 많은 눈이 내려 발목을 붙잡히고 있다. 남들이야 겨울 한철 일이 없단 핑게로 동면상태이지만 나에게는 긴급한 일들이 많음에도 날씨가 허락질 않는다.

그 전같으면 날이 좋던 흐리던간에 별다른 감흥(感興)이 있질 않았지만 농촌생활은 기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다. 요 근래는 더더육 날씨에 민감할 수 밖에 없지만 평소에도 저녁에 자리에 눕기 전, 그리고 잠에서 깨면 스마트 폰으로 오늘의 날씨를 보면서 매일 할 일을 계획하고 점검한다.

처음 귀촌하여 농삿일에만 전념할 땐 비가오나 눈이 내리면 오히려 쉼의 시간이 주어졌지만 건축일이 가미되면서 날씨에 민감해지기 시작했다. 벌써 10년이 지났느냐며 의아해 하는 지인들이 많지만 난 그 시간들을 가혹할 정도로 내 자신을 학대시키며 보냈었다. 처음 3년쯤 되었을까, 인천의 L형이 이젠 목회 감각을 잃어 復歸하긴 힘들겠다며 그간에 땅을 일궈 재산 꽤나 늘렸느냐며 속을 뒤집어 놓는 말에 목회감각(The Sense Of Ministry)이란 말을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감각적으로 해보질 않아서 그 말이 생소했고, 설령 그런 감각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난날 목회를 돌이켜 보면 적시의 목회적 타이밍을 놓쳐 낭패를 보게 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순간의 타이밍을 놓쳐 목회적 손실이 발생하게 된 경우이다. 꼭 필요한 시간에 그 교우를 심방해 불필요한 오해를 풀어야 했는데 그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그 타이밍에 그 계획을 추진했어야만 했다. 

그 타이밍에 몸을 던져 그 기회를 포착해야 했는데 놓친 것이다. 그 때 교회를 이전했어야 했는데 이전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뛰어난 리더는 기회의 문이 열릴 때 어떤 방해물이라도 뚫고 전진해야 한다. 바울은 마게도니아 환상을 본 후 복음의 기회를 포착하고 유럽으로 나아갔다.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충언을 듣고 죽으면 죽으리라 하며 그 다가오는 하나님의 카이로스 기회에 몸을 던졌다.

지금은 어차피 은퇴의 시기를 넘겼으니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없지만 나에겐 목회 감각은 커녕 삶의 센스도 남아 있질 못하다. 대신 팔자에도 없는 집을 50번씩이나 짓다보니 이젠 건축 일이나 정원을 꾸미는 일에 더 달관해져 있다. 그리고 목회의 감각은 떨어져 있겠지만 자연속에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 그리고 목회 현장을 떠나 내 실존을 진정으로 보았다. 생각은 깊어졌고 하찮은 풀 한포기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마침내 농지전용 허가가 떨어져 수백만원의 전용비용을 오늘까지 납부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시내 몇군데로 다이얼을 돌려보니 큰 도로는 대게 눈이 녹았다는데 여긴 동네 입구까지 빙판이 만들어져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올라 갈 수가 없어 큰 길까지 걸어나가 전용금을 납부했다.

남들은 하던 일도 멈추는 계절인데 난 600여평의 너른 정원과 텃밭, 그리고 넓은 거실과 또다른 밀실을 꿈꾼다. 아마도 그간의 노하우를 살려 제대로 된 내 집을 가져 보려고 10년만에 실행하려 하기에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아무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독특한 체질때문에 왁자지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만의 공간이 늘 필요했고 이제 거사(?)를 준비중이다.

누구에게도 아늑한 밀실이 주어지지 않는 공간에서의 한 생애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럴 때 옛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거짓 낭만에 빠질 위험이 상당하거니와, 그럼에도 그 옛날에는 다락방이 있었고 지하실이 있었고 동네에는 골목이 있고 공터가 있고 거기서 5분쯤 벗어나면 야산이 있고 들판도 있었는데, 이젠 그 안팎 모두가 아파트의 신전이 되었으니, 어디 숨을 만한 방 하나 없는 처지 아닌가?

한국 사회가 가파른 팽창과 발전의 신화를 쓰던 저 1970년대에 박완서는 ‘휘청거리는 오후’와 ‘도시의 흉년’을 통해 이미 대도시의 중산층 가옥문화가 상당히 폐쇄적으로 급변할 것임을 증언한 바 있다. 

그 때는 서울 도심에 ‘신흥 양옥집’이 들어섰고 강남에는 아파트가 기립하던 때였다. 아파트는 인간의 모든걸 빼앗아 갔다. 골목길에서 이웃과 나누던 정담을 훔쳐갔고, 담장너머로 넘겨주던 사기 그릇에 담긴 情을 추방했다.

뒤늦게 ‘도시의 흉년’을 경험한 세대는 도시를 탈출하고 싶어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다. 직장생활, 자녀 교육 등에 발목이 잡혀 마치 거미줄에 달린 잠자리처럼 발버둥치지만 그러다가 삶의 허무를 이야기한다. 요컨대 어디 먼 곳으로 떠나서 숲 속을 걷고 새벽 안개와 더불어 명상을 하고 청신한 가을 기운을 쐬는 것을 ‘힐링’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마치고 돌아온 후의 삶에 뭔가 작은 변화의 기미라도 있어야 할 테지만, 삶이란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간단한 것이 못 된다. 

한겨울엔 스키장을 찾고 한여름엔 해변에서 썬텐을 하는게 과연 진정한 문화인인가? 현대인의 최대 불행은 사유할 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도심 어디에도 사유할 곳이 없다. 사무실에서도, 거리에서도 심지어 저마다의 집에서도. 우리는 사유할 공간이 없다. 책 읽을 곳마저 강탈당하고 있다. 온통 우리의 운명을 티브이에 맡기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서글플뿐이다. 

나는 번다한 회합에는 일절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게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내 나름대로 지켜온 일상의 작은 원칙, 곧 최다 5인 이상이 모이는 자리에는 나가지 않는다는 룰을 정해놓고 가능하면 혼자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치유 혹은 공감 그리고 힐링. 이러한 단어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한반도의 삶이 너무 벅차고 너무 처절하고 너무 야박하고 너무 비인간적인, 그야말로 어떤 이유로든 집단 멘붕(멘탈붕괴)과 집단 힐링이 교차하는 그런 양상임을 말해준다. 

가파른 언덕을 허덕대며 따라가는 양상에서 잠시 갓길로 빠져서 책도 읽고 소요도 하고 빈둥거리기도 하는, 그런 곳이 필요하다. 이 세상엔 바닷가 모래알을 손에 쥘 수 있는 천재는 아무도 없다. 다 가진 것 같아도 결국은 손가락 틈새로 다 빠져 나가고 여전히 빈손이 될뿐이다. 세상의 모든 인연이란게 다 그렇다. 내 것이란게 존재할 수도 욕심껏 다 가질 수도 없는 부질없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더 많이 가지려고 혈안이 된다.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자식들에게 손벌리지 않으려 작정했다. 내가 부모에게 용돈을 얻어썼으니 나도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면서 살지 아무리 옹색해도 손벌리지 않으려 한다. 부모의 작은 주머니엔 자식의 큰 손이 들어가지만 자식의 큰 주머니엔 부모의 작은 손이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내 조부께서 일러주신 말씀이다. 내 자식인 것만으로도 행복한 데, 더이상 뭘 요구할 것인가?

옮겨올 소나무와 정원수도 아껴 둔 것이 있고 그간 남은 건축자재도 창고에 충분히 비축해 놓았다. 꼭 필요한 자재와 인건비만으로 내 집을 마련하려고 준비중이다. 이제 이번주부터 시작하면 가장 추운 1월달에 신축공사를 해야하니 엄청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내 자신도 아무 할일없이 우두커니 겨울나기 하기엔 시간이 너무 아깝고 인부들도 더이상 놀릴 수 없는 처지라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

오늘밤도 영하 10도 아래도 기온이 급강하 할 거라는 예보가 나와 있지만 조금 일찍 찾아왔을뿐 원래 겨울은 추운 거라고 중얼거리며 일단은 냉방이기만 바람은 피할 수 있는 아지트가 있음을 감사한다. 바닥이 차가워 걸상에 양반다릴 하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미소를 지어 본다. 하지만 부자라고 쓰고 쪼다라고 읽히는 사람에 비하면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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