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고쳐 쓰는게 아니다?

정삼열 | 2023.11.28 10:34
'밀레니엄 맨'에 나오는 이야기다. “나는 배운 게 없어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다.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경청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통의 90%는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듣는 것이라고 해서 다는 듣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요즘 현상을 타개하려고 애써 변명하려는 사람을 측은(惻隱)한 심정으로 대하고 있다. 

성격이 너무 급하고 단순하여 몇번씩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서 대략난감일 때가 많아 조금 거리를 두었더니 그게 큰 상처가 되었나 보다. 가정사를 비롯해 부부관계 가족관계 등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것까지 해결해 주어야 하는 곤욕(困辱)을 치루다 보니 이젠 내 자신을 위해 멀어지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내 주변엔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 철저하게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남의 희생을 당연시하는 게 얄밉다는 생각이 들어 말문을 닫아 버리고 전화를 차단시킨 사람도 있으며 귀도 물론 닫아 버렸다. 자기 생각만 옳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려는 사람을 가까히 하면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운 데미지를 받기에 상처를 안받으려 기피 인물로 선정해 버렸다.

유학자였던 조부께서 늘상 하신 말씀에 "인간은 고쳐 쓰는게 아니라"는 말씀이 꼭 맞는 말씀은 아니지만 각박한 세상을 살다보니 어느 정도는 일리는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있다. 사람이 교화된다는 건 산고보다도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내 진심이 통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던가, 언젠가는 변화될 거라는 기대를 포기한지가 오래이다. 

棺 뚜껑을 덮을 때쯤은 변화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폴 투르니에'는 “소통이 잘 안된 이유는 내 생각이 옳다거나 내 방식대로 결론내거나 상대방을 말을 자르기 때문”이라며 “경청과 공감은 신뢰를 부르는 소통의 비밀”이라고 강조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을 절반만 듣고, 들은 것은 절반만 이해하며, 이해한 것의 절반만 믿는다. 나도 그런 부류이지만 정말 말하는 것보다 들어주는 일이 더욱 힘들다.

나도 일전엔 말하기를 무척 좋아했던 것 같다. 남을 설득하는 은사가 있는 걸로 착각할 정도였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말수가 적어지고 대인기피증에 걸린 사람처럼 함구할 때가 많아졌다. 직업적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남의 말을 듣는 건 20%도 안되었던 것 같다. 주로 스피커 노릇을 했는데 이젠 아무리 친해도 내 속내를 들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목사가 가장 힘들어 하는 순간은 강단 아래에서 남의 설교를 듣는 것일게다. 도무지 남의 말을 귀기우려 들으려 하지 않는다. 나이 먹으면 더 심해진다. 내 주변 인사들을 보면 미천한 경험을 절대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경청은 엿바꿔 먹은지 오래이다. 대단히 미안하고 죄송하지만 예전엔 노인네들의 말씀 중 들을만한게 있었는데 요즘은 차라리 귀를 막고 싶을 때가 더 많다.  

경청(敬聽)의 뜻은 존경심을 가지고 진지한 눈빛과 진심으로 마음을 실어서 상대방의 말을 왕이 말씀하시듯이 잘 듣겠다는 의미인데 과연 젊은이들이 그렇게 생각할까? 강단에서 흘러 내리는 말씀을 교인들이 몇%나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가? 미래학자인 톰 피터스는 "20세기가 말하는 사람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경청하는 리더의 시대가 될 것이다"고 강조했다. 

또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의 대화 습관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를 단 하나만 들라고 한다면, 주저 없이 '경청하는 습관'을 들 것이다"고 말했다. 상대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달하고자 하는 말의 내용은 물론이며, 그 내면에 깔려 있는 동기(動機)나 정서에 귀를 기울여 듣고 이해된 바를 상대방에게 피드백(feedback)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한 기법이다. 한자로 들을 청(聽)에 대한 재미난 해석이 있다. "청(聽)"자를 부수로 자세히 (耳 + 王 + 十 + 目 + 一 + 心:이+왕+십+목++일심) 이렇게 된다. 즉 왼쪽에 귀 이(耳)자 밑에 임금 왕(王)자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열 십(十) 자 밑에는 눈 목(目)자를 옆으로 눕혀놓은 글씨가 있다.

그 아래 한 일(一)자와 마음 심(心)자가 차례로 놓여 있다. 이를 풀이하면 왕의 귀처럼 커다란 귀로 집중해서 들으라는 것이고, 열 개의 눈으로 파악해서 한 마음으로 듣는 다는 것이다. 바로 경청이란 이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 해석인가? 이렇게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코칭을 잘하기 위해서는 경청, 질문, 인정과 칭찬, 메시징 등 코칭에서 요구하는 스킬들에 대해서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 경청> 이란 상대가 하는 말을 정확히 가슴속으로 이해하는 과정이다. 경청은 상대의 이야기를 단순히 수동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듣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다시 말해 듣기는 청각기능이지만 경청은 적극적이며 의도적인 행동이다. 이렇듯 경청은 이해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듣는 것을 말한다. 상대의 내면으로 들어가 진정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상대의 관점을 통해 사물과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상대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나아가 그들이 느끼는 감정마저도 이해한다. 그래서 적극적인 경청의 본질은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감정적으로나 지적으로도 하나가 되어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두 아들을 둔 한 여인이 어느 날 예수께 찾아와 다음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예수가 나라의 왕이 되면 한 아들은 오른 편에 앉히고, 다른 아들은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는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첫째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묻고 있으며 둘째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셋째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며 넷째로 예수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면서도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만을 청하고 그것을 바라며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십년간 목회자로 살았더라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일 수도 있다는 걸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의 어디를 들추어 보더라도 우리는 이와같은 장면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은 안된다고 하는 것을 인간들은 할 수 있다고 한다든지, 아니면 하나님은 된다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안된다고 우기고 있는 장면들 말이다. 요한복음 13장은 최후의 만찬이 시작되는 장이다. 이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 중 하나가 자기를 팔리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이 후에 이어지는 요한복음 14장에서 17장은 소위 다락방 강화로 일컬어지는 기독교 복음의 정수들이다. 

제자인 내가 주님의 발을 씻겨 드려야지 어떻게 주님께서 나의 발을 씻길 수 있다는 말인가. 오늘날 우리라면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베드로의 반응이 옳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요13:8)'했다. 어떻게 선생이 제자의 발을 씻기신단 말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요13:8)'고 하신다.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 한마디에 베드로는 그만 기가 죽어버렸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알아서 자신의 발을 주님께 맡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뭐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다니까, 자신의 이성이나 의지와 상관 없이 자신의 발을 맡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베드로는 주님의 의도나 생각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주님과 떨어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주님을 좋아하고 주님과 같이 있고 싶어 하더라도,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항상 베드로 같은 부인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요13:21-26)'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양보하고 보아 주더라도 여기서 한가지 이해 못할 내용은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찌하여 베드로나 요한이 가룟 유다의 멱살을 잡고 결투를 벌이지 않았느냐 하는 점이다. 

사실 베드로 정도의 다혈질이라면 나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종 인 말고의 귀를 벨 일이 아니라, 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가룟 유다의 목을 베었어야 옳았다.  우리가 아는대로 가룟 유다의 배신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면, 가룟 유다의 그러한 배신에 대한 정보를 미리 확실하게 알고도 대처하지 않은 베드로나 요한은 가룟 유다의 공동정범이라 하여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지금 누가 당신을 배반할 것인지 분명하게 일러주고 계시는데, 그런 내용을 모두 듣고 난 다음에도 가룟 유다에게 뺨 한대 때리지 않던 베드로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고 하고 있으니, 우리 같으면 베드로의 그 시커먼 속을 모르겠는가. 주님을 죽이고 배반하는 일에 공동정범으로 끼어들어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노라 한다. 

이래서 주님은 외롭다. 자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사람들 속에서의 외로움. 바닷물 한 가운데서 식수가 없어 목말라 하는 목마름도 이런 열성적인 추종자 가운데서의 외로움 보다는 덜하였으리라.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하면 외로워진다. 십자가의 길로 나아 가는 데, 최소한 가롯유다의 간계함을 모르는 척하고 말고의 귀만 자르는게 될법한 일인가? 

그 분의 비전은 본인이 슈퍼스타가 되어 온 세상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오히려 유능하거나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들이 아닌 보통 사람들, 더군다나 그릇된 비전을 가진 자들을 불러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도록 하셨다. 과연 갈릴리 촌사람들은 성공적으로 온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행 17:6). 그들의 성공은 피그말리온 효과의 결과가 아니었다. 예수의 무모한 도전 역시 아니었다. 성령께서 믿는 자들을 통해 더 큰 일을 할 것을 내다보셨기에 가능한 믿음이자 신뢰였다. 

마귀는 지금도 세상사람들뿐 아니라 소위 유명한 목회자나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되고 다른 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코웃음치게 하여 무조건 다스리고 정복하는 자가 최고라는 악마적인 사상을 넣어주고 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같은 길을 가는 동안 3년 동안을 함께 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의 관심사가 달랐다. 

똑같은 길을 가면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에 몰두했지만 제자들은 사람의 일에 몰두했다. 즉 예수님의 관심은 십자가였지만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의 출세와 영달을 꿈꾸고 있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세상을 이긴다면 아마도 예수님이 '우레의 아들'이란 별칭을 붙여준 야고보와 요한이었을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서 있었지만 예수님은 본 것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아마도 이 제자들은 입이 근질근질 했을게다. 이 순간 변화산의 체험이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바뀌는 것이다. 다른 9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베드로를 공격했을 것이다. 제자들의 이런 모습은 정말 진상중의 진상들처럼 보인다. 어떻게 이렇게 철저히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을까. 

내 인생을 되돌아보니 회한의 세월이었다. 다름아닌 제자들의 모습이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과의 불일치는 말 할 것도 없고, 교회와 교인 심지어는 50년동안 함께 한 친구들과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자주 가위에 눌리며 영원히 깨지 않을 악몽을 꾸는 것 같기도 하고, 불행의 신이 나만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늘밤도 다분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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