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밤이 전혀 두렵지 않다.

정삼열 | 2023.11.24 10:10
"눈길 한번 주지않아도 종일 들고 나는 저 황토빛 바다는 겨울을 향하여 끝 없는 몸짓을한다. 아~ 나 차라리 남루한 허물 벗어놓고 겨울이야기 가득 담긴 저 파도속으로 몸을 숨기고 싶어라. 이미 불꺼진 장항엔 찾는 이없고 갈매기조차 날지 않더라." 

십여년전 겨울바다 장항에서 읊조린 싯귀중 일부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시인이 될만한 시상을 발견할 수 없는데도 이 일로 정식으로 등단을 했었다. 

연애편지 대필로 몇번 밥을 얻어 먹어 본 적은 있지만 詩하곤 거리가 먼데 심사위원들이 그 날 착오를 일으킨게 분명하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지금도 작기장에 무엇인가를 끄적인다. 꼭 시인이어야만 글을 만드는게 아니다. 독특한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전혀 이어지지 않을 법한 것들을 이어 붙여 생각의 편린들을 멋들어지게 쌓아올리는 시인들의 세계완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시인이랍시고 겨울을 노래한다.

오늘도 엄청 추웠지만 내일은 더 추울거란 예보가 나왔다.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는 더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는데 곳곳에서 춥다고 야단이다. '발열 내의'를 입은 위에 오리나 거위 털을 가득 채운 두툼한 겉옷, 따뜻한 캐시미어 목도리까지 두르고도 추위에 움츠러든 사람들이 흔하다. 

종일 얼음을 지치고 들판에서 뛰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다. 기상예보가 자주 언급하는 '체감기온'도 기온에 풍속을 고려한 객관적 수치일 뿐이다. 개개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추위는 날이 갈수록 커져간다. 군대에서 혹한기 훈련을 가서도 이내 땀에 절어 거추장스러운 털내의는 몰래 벗어두었듯, 운동량과의 관계가 일차적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영상의 날씨에도 추위를 느낀다. 그러나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영하 10도의 강추위도 견딜만 하다. 내복에 추리닝을 껴입고도 발이 시려워 안절부절인데 시장 상인들이나 전방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은 얼마나 추울까를 생각하며 참아 견디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입동했으니 추운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제까지만 해도 땀흘리며 일했기에 체감온도가 더 춥게 느껴진다. 하지만 겨울은 역시 겨울다운게 정상이다. 

추위하면 시베리아 추위가 연상되는 데, 설원을 미끄러지는 장면이나 시베리아 열차가 지나가면서 눈이 양 길로 흩뿌려지는 모습을 기억한다. 빠스테르나끄의 소설을 영화화한 '닥터지바고'에 등장하는 시베리아는 유형장의 을씨년스러움과 그 얼어붙은 땅에서 카튜샤를 쫓아가는 네플류도프의 모습이 아른대는 톨스토이의 '부활', 그리고 '전쟁과 평화'를 연상하게 한다. 

우리가 기억하는 시베리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내일 서울이 영하 6도의 강추위라는 데, 감히 경험해 보지 않은 혹독한 추위는 외출 나온 시민들은 눈만 빼고 온몸을 모피로 칭칭 감쌀게 뻔하다. 

밖에 나오면 불과 3~4분 만에 몸이 얼기 때문이다. 이런 날씨엔 야외활동 시간은 최대 20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모진 환경이긴 하지만 인류가 이미 4만5천년 전부터 북극권에서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살았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인간의 적응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른걸 주장하기 전에 내 자신을 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미래에 대한 불안이 한동안 나를 짖눌렀지만 어느새 모험을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몇번의 미천한 경험이지만 또한 건방진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전문가나 하는 소릴 지껄이는 내 자신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불과 몇년전만 해도 막상 시골에 내려와 무엇을 할까 고민했는데 이젠 남에게 조언을 하고 훈수를 둘 정도가 되었으니 많이도 변했다. 몇번의 건축과정을 통해 업자와의 갈등을 겪으면서 하도 속을 썩어서 그런지 그 정도라면 내가 지어도 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모험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이젠 잘 짓는다는 소리는 못들어도 왠만한 건축가 흉내는 낼 수가 있고, 가능한한 양심적으로 짓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 가다보니 원가가 많이 들어 큰 이익을 내진 못하고 있지만 소일거리로는 그만이다. 

물론 아무나 하는 건 아니지만 노력하면 안되는 것도 아니다. 하긴 최순실이도 하는 데, 국가경영도 못할게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대통령직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만 그건 시간이 없어서 생각을 접었고, 집짓는 일은 직접 설계하고 시공하지만 큰 어려움은 없을 정도이다. 오기가 아니고 그간 인맥을 넓혔고 노하우도 생겼고 내 적응력을 실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일찍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사는 힘은 강하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동물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의 적응력, 즉 익숙해짐은 환경적이나 생존의 부분뿐만 아니라 감정적인 면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사랑하는 이와 아픈 이별을 한 뒤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은 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웃을 수 있게 되고 저 엄중한 독채 치하에서도 평범한 생활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이 익숙해짐은 언뜻 비인간적으로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인간 생존의 원천이자 근본적인 힘인 것이다. 적응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생존을 이어갈 수 있고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슬픔과 아픔의 경험을 절대 잊을 수 없는 이가 있다면 그는 머지 않아 정신병동에 앉아있게 될 것은 자명하다.  

내가 군목으로 종군했던 강원도 인제 원통은 영하 10도 정도엔 선풍기를 튼다 할 정도의 매서운 추위였다.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DMZ를 종힁무진하던 패기가 아직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당시만 해도 내복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근래엔 겨울철엔 동남아에 가서 살고 싶다는 셍각이 들 정도가 되어 버렸다.

매서운 추위 앞에 전국이 얼어 붙었다. 우린 혹독한 겨울 추위를 흔히 "동장군(冬將軍·General Winter)"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전쟁에서 유래했다. 나폴레옹 제국 체제의 절정기에는 영국을 제외한 유럽 대륙의 대부분이 프랑스의 직·간접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폴레옹의 대군은 정복한 국가의 군대를 끌어들여 규모를 키워 갔다.  

마침내 유럽 역사상 최대 규모인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프랑스 장군들이 지휘하는 다국적군의 공세에 밀려 러시아군은 계속 후퇴했다. 9월 7일 보로디노에서 나폴레옹군이 승리를 거두었지만, 패퇴하는 러시아군은 자국의 마을을 모조리 불태워서 적군이 물과 식량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나폴레옹군이 9월 14일에 모스크바에 입성했을 때 이곳 역시 도시 전체가 불타서 점령군이 묵을 집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는 지탱하기 힘들게 된 나폴레옹군은 10월 중순부터 서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보급 부족과 전염병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은 상태에서 러시아군이 반격을 가해 왔고, 본격적인 러시아의 겨울 추위가 군사들을 괴롭혔다. 러시아 군대만큼이나 "동장군"이 나폴레옹 군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서, 무려 40만명이 희생당했다. 러시아의 동장군이 실력을 발휘한 것은 나폴레옹 때만이 아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하기 그 이전에 있었던 대북방전쟁(1700~1721)에서 강력한 스웨덴군이 러시아로 침략해 들어왔을 때에도 유별나게 추운 겨울 추위로 1만6000명이 사망하는 막대한 피해를 보았다. 

역사의 교훈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지, 히틀러 역시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1941년에 소련을 침공하면서 히틀러는 전격전(電擊戰)을 통해 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전투가 장기화되어 혹독한 겨울 추위에 시달리면서 70만명 이상의 전사자가 생겼다. 러시아의 동장군은 몇 차례나 조국을 지켜 주었다. 

그런 살인적인 추위는 아니더라도 오늘 날씨는 정말 한겨울의 매서움을 유감없이 들어내어 얼어죽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전국을 강타했다. 내일 인부들이 출근하려면 애를 먹겠다는 생각에 힘들면 하루 쉬자고 종용했지만 출근하겠다는데 강행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불안하기만 했다. 사실은 내일같은 날은 내가 쉬고 싶은 심정이다. 

특히나 난 뇌졸증 위험 인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절대 추운 날 외출이나 일을 해서는 안되는데에도 불구하고 인부들을 나몰라라 할 수 없어 늦게까지 현장을 지키다 보니 점점 힘들어 진다. 오늘처럼 시간이 더디 가는 날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힘겨운 하루였다. 어젯밤에도 시원찮은 전기장판 하나를 의지하고 잠을 자다 한기가 들어 잠에서 깨었었다. 

선풍기처럼 생긴 전기난로를 틀어 보았으나 약간 온기만 느껴질뿐 몸서리쳐지도록 추운 날씨였다. 추위엔 강하기로 소문 난 나도 이젠 별 수없이 늙어가나 보다. 잠자리 날개같은 잠옷을 입고 잠을 자는 사람들은 겨울밤을 어떻게 생각할까? 두터운 옷을 껴입고 눈만 내놓고 애써 잠을 청하는 처지지만 그 걸 불행하다는 생각은 오래전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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