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대화가 생각나는 겨울 밤

정삼열 | 2023.11.18 10:51
내가 입맛을 잃었다는 건 별로 중요한 뉴스거리가 아니다. 나이먹으면 오감중 한두개는 틀림없이 고장나게 되어 있기에 걱정거리가 아니다. 

오히려 오감 모두가 살아 있는게 문제일 수도 있다. 나일먹으면 적당히 청각이 떨어지는게 정상이다. 너무 귀가 밟아 듣지 말아야 할 소릴 다 듣게 된다면 그게 곤욕이다. 

너무 시각이 좋아 세상의 모든걸 보게되는게 불행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식탐 하나가 줄었다고 크게 염려할 사항은 아니다. 내가 어렸을 때, 조모님께서는 딱딱한 사과 하나를 깨물지 못하고 달팽이 숟가락으로 사과를 긁어 잡수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저렇게 잡수시면 무슨 맛이 있을까가 궁금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과 하나를 다 잡수시곤 했었다. 

배도 그렇게 잡수셨고 감이나 백도는 이가 없기에 우물거리며 드셨다. 맛이 있는지를 물으면 죽지 않으려고 먹는다는 뜻모를 말씀을 하시곤 했다. 미각을 잃으니 산해진미도 소용이 없다. 그래서 나는 늙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가끔 성경적 인물을 연구하다 늙어서도 식탐이 전혀 줄지 않았던 이삭을 생각한다. 에서에게 별미를 가져 오면 축복하겠다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 데, 야곱이 이를 가로채지만 그 나이에도 사냥한 고기를 즐겼다니 대단한 식도락가였던 건 아닐까. 하지만 미각은 살아 있었지만 청각과 시각은 별로였던지 야곱을 에서로 오인하여 축복을 해버리고 만다. 심지어는 털복숭이 에서를 구별하지도 못했다. 

나는 미각은 별로이지만 아직 촉각은 그대로이고 시각이나 청각 후각도 정상이다. 큰 딸 작은딸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에 아직 늙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정작 중요한 것은 입맛이 없거나 밥맛이 없어 음식을 잘 먹지 못하는게 아니라, 입맛없게 만드는 사람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는 점이다.  

난 내 삶을 불행한 삶이라고 자학해 본적이 별로 없다. 기력이 급속하게 떨어졌지만 산삼 한뿌리를 탐하고 싶은 생각이 아직은 없다. 걸음걸이가 씩씩했던 젊은 날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57킬로의 몸을 움직이는데 큰 칼로리가 필요한 건 아니기에 그냥 지금에 만족하며 살려한다.  

내가 영위하는 삶에 대하여 여러 평가가 있는 걸 잘 알고 있다. 가끔 존경스럽단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대표적으로 어리석단 생각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죽으면 썩어질 걸 위해 자린고비로 사는 나를그렇다고 생활에  어리석은 사람으로 매도하는 걸 극구 변명할 생각이 없다. 

나는 저녁 무렵 부턴 화장실 변기의 물을 내리지 않는다. 하룻밤에도 대여섯번은 가야 하는데 한꺼번에 모아 아침에 흘려 버린다. 까짓껏 물 한번 내리는데 얼마냐고 묻는 사람에겐 할 말이 없지만 예전엔 요강이 넘치도록 방안에서 일을 보고 아침이면 팔이 부들거릴 정도로 무거운 걸 들고나가 버렸던 시절과 비교하면 이것도 감지덕지(感之德之)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생활습관이 그런식으로 고착되어 버렸다. 오늘은 간밤에 내린 많은 눈으로 현장은 물론 외출조차도 할 수 없었지만 보일러도 없는 냉방에서 두터운 외투를 걸치고 앉아있는 내 모습이 남들의 눈엔 처량하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개념치 않는다. 겨울철에 난방 장치가 없는 방에서 지낸다는게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굳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그 정도로 절박한가를 묻는 사람도 없지만 굳이 내색하고 싶지 않다. 그냥 불편하지 않을 정도면 만족이고 지독한 가난이 아니라면 이대로 만족하며 살려고 작정했다. 가난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없는 인류의 문제이다. 누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쉽지 않다. 동화 '왕자와 거지' 속의 왕처럼 잠깐 동안 '거지 체험‘을 해보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누가 자처해서 가난을 선택할까? 

그러나 역사에는 부(富) 대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이들이 있다. 스스로 낮은 자리에서 없는 사람들의 빛이 됐던 예수가 그랬고, 부처는 한없이 낮아진 상태에서 생사의 깨달음을 얻었다. 마더 테레사 같은 성인의 삶도 그렇다. 내 주위를 둘러보면, 남들이 삶의 잣대로 여기는, 돈이나 큰 것을 제대로 지닌 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여럿 있다. 

인간성은 그 어떤 인간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지만, 그 좋은 인간성 때문에 가난 할 수밖에 없는, 야릇하고 묘한 심성의 사람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내 일, 네 일을 넘나들면서 서로 돕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정한 땅 분배를 명령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부의 불균형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희년이라는 제도를 통해 다시금 부의 공정함을 회복시키는 전략을 사용했다.  

나는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그 가능성을 읽는다.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읽는 방식이야 여럿이겠으나, 가난한 자를 구제해야 한다는 도덕 이야기가 아니라 부자의 구원과 관련된 나사로의 이야기로 읽는다.  다시 말해 교만과 어리석음이라는 황폐함에 빠져든 부자의 삶과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신비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읽는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부자를 구원하기 위해 나사로를 그 집 앞에 보낸 이야기로 읽는다. 그런데 부자는 나사로를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로 보지 않고 거지로만 보았다. 구제의 대상으로만 보았다. 그래서 얼굴도 내밀지 않고 외면해버린다. 만일 구제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자로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그래도 냉대했을까? 정녕 따스하게 맞이하고 주린 배를 채워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부자도 구원 받았을 것이고, 나사로 또한 구원 받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부자는 스스로 구원받지 못한다. 오직 가난한 자를 통해서 구원받는다.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이것이 성경의 역설이다. 가난한 자는 부자를 구원하는 제사장이라는 것이 가난 속에 깃든 또 다른 신비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진자들은 가난한 자의 제사장적 가치에 눈을 떠야 한다. 

때론, 내가 존재하는 이유와 방향성에 대한 회의가 들 때가 많다. 무엇을 위해 이리 급하게 사는지를 곱씹어 보기도 하고 빨리 간다고 선착하는게 아니건만 속도 경쟁에 내몰리는게 아닌지를 우려한다. 큰 것, 많이 가진 것이 善이 되어 버린 이 시대의 퇴폐적인 흐름에 동화되어 어쩔 수 없이 나도 속물적 근성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모습에 연민을 느끼며 가련하게 생각들 때가 많다.  

남들보다 더 잘해야 되고 더 앞서 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본질을 놓치고 허상에 사로잡혀 살 때마다 결국 후회만 남기고 떠날텐데 내 인생에 커다란 스크레치가 남을 걸 알면서도 계속 중단할줄 모르는 내 인생에 가련함을 느낀다. 

교회도 마찮가지이다. 목회자들이 교회 사이즈 키우는 것을 지상명령인 것처럼 여기고 혈안이 되어 있지만 강속구만을 던지는 투수의 생명은 길지 못하다. 강속구가 주무기인 건 틀림없지만 타자들 눈에 익숙해지면 빠른 공일수록 홈런을 많이 허용하게 된다. 목회는 단거리가 아닌 마라톤 경주와 같다. 모방과 인스턴트식 목회가 아닌 장기목회의 계획을 수립하고 의식전환과 자기개발에 힘써야 하는데 과연 한국교회가 그러고 있는가?  

자본의 힘이나 지역적 특성, 목회자 개인의 특별한 은사에 의해 급성장한 경우를 마치 교회성장의 정상적 모델처럼 여긴다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바른 목회를 하려는 많은 목회자들을 실망시킬 수도 있다. 

예수께서도 열두제자만을 만드셨다. 그 중에 한명은 배신자였다. 나는 군목시절 수백 수천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뼈아프게 후회하고 있다. 초코파이와 통닭 한마리씩 안겨준 엉터리 신자를 만들었을뿐이다. 

그것도 성공이라고 울산경비사령부로 영전을 했다. 나 스스로를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평생 열두명만 가슴에 품으면 성공이다. 어제도 인천에서 후배 목사님이 전화를 주셨다. 정체된 한국교회 성장으로 인해 모든 목회자들의 시름이 깊어지는 것 같아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이다. 무슨 말로 위로하고 격려할지 몰라 한숨만 내쉬었다. 

평생 열두명만, 그것도 한명은 배신자였지만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끝으로 흩어졌다. 예루살렘에 5000명이 모였던 기록이 있지만 마가의 집에서 모인 숫자는 120명을 넘지 못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그들을 움직인 성령의 역동적인 힘이었다. 서두르지 말고 한명 한명 제자를 삼으라고 조언했다. 나도 그 유혹에서 벗어나질 못했지만 목회자들에겐 숙원(宿願)이 아닐 수 없는 문제이다. 그 숫자에 희비가 교차하며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 찍힐까봐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연민이 안생길 수가 없다.  

산야에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듬성 듬성 보이는 겨울밤, 상당히 춥긴하지만 밖에서 사는 고양이들에 비하면 일단 찬바람은 막을 수 있는 공간안에 있는 걸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기장판으로 침상이 뎁혀지면 거기가 천국이 될 전망이다. 겨울이면 문풍지가 더덕더덕 붙어 있는 방문사이로 칼바람이 밀고 들어 왔지만 온가족이 도란도란 나누었던 그 꿈의 대화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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