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실미도

diakonie | 2013.10.03 23:56


유래없이 길었던 열대야 현상도 이제 막을 내리나보다. 오늘은 말복과 입추가 지난 지 닷새째, 정오 즈음부터 내렸던 삼삼한 빗방울이 대지의 열기를 식히더니 밤부터는 제법 쌀쌀한 기운이 감돈다. 마리아 라이너 릴케의 ‘가을 날(Herbsttag)’ 이라는 시가 머리에서 맴돈다.

 

Herr, es ist Zeit.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Der Sommer was sehr gross. (지난) 여름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의 싯구는 나도 모르게 이렇게 이어진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정말 위대했습니다.
녹색혁명을 노래하셨던 가카께서
위대하신 4대강 사업으로 강물을 틀어 막으시더니
드디어 4대강을 녹색으로 물들였나이다.
주께서는 열심히 일한 가카께 큰 상을 내려 주셨나이다.
지금 4대강에 가득 찬 녹차라떼가 바로 그것이나이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부디 이 녹차라떼를 전부 The Blue House에 다 보내주셔서
The Blue House를 The Green House로 변화시켜주시고
가카께서 이루신 녹색혁명의 대미를 장식하게 해주소서.

하지만,
녹색혁명을 이루었다고 아무리 자화자찬을 해도
12월에 전국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싶은,
로고가 새빨간 새빨간당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외로운 가카는 오랫동안 외로이 머물 것입니다.
잠 못 이루어 독서하고
캠프 데이빗 골프장에서 카트를 몰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았던 부시에게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잎이 지면 녹색 강물 사이를
불안스레 이리 저리 헤멜 것입니다.

---------

어쨌든 위대했던(?) 여름은 이제 막을 내릴 모양이다. 우리집 앞에 펼쳐진 광활한 간척지 벼농장에 방역하는 헬기의 굉음이 요 며칠간 작렬하는 걸 보면 곧 수확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한다. 하지만 통계에 의하면 책이 가장 많이 팔리는 계절은 여름이다. 요즘 대한민국의 가을은 책읽기 보다는 놀러다니기에 더 바쁜 계절이라는 것이 서점연합회의 결론이다.

 

이번 여름에 나는 특별한 책 한권을 읽었다. “자넨, 하나님이 살렸네” 라는 부제가 붙은 2004년 3월에 발행된 양동수 장로(아현교회)가 쓴 ?실미도 생존실화?라는 단행본이다. 2003년 12월 24일 성탄절에 맞추어 개봉된 영화 ‘실미도’는 개봉 58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돌파한 화제의 영화이다. 나도 그 천만 관객 중 한 명이었다. ‘대중 매체’라는 것은 그 영향력과 중독성이 매우 강력하여 나 자신도 이미 ‘실미도’에 관한 정보는 ‘영화’를 통해 각인되어 있었다.

 

‘도가니 법’이라는 법까지 제정하게 된, 최근에 상영된 ‘도가니’ 라는 영화의 영향력에서 보듯이 오늘날 우리들은 영상물의 영향력에 끌려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실미도’의 생존자 양동수 장로의 증언인 이 책은 부시의 동네 할리우드식 상업적 영화가 얼마나 사실을 왜곡하고 악영향을 끼치는지 소름 돋게 알려주고 있다.

 

아무리 흥행에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영화 ‘실미도’는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이 책의 저자 양동수는 영화 ‘실미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훈련병들을 흉악범이나 사형수로 몰고, 국가를 파렴치범처럼 그린 점은 영화가 아무리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해도 너무나 어이없고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가와 감독의 상상력만으로 유가족들의 한맺힌 가슴에 상처를 하나 더 남기면서까지 상업화할 수 있는지 의문을 남기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말이 영화 ‘실미도’의 진실을 말하는 것이며 저자는 그 왜곡된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 ‘실미도 생존실화’라는 책을 쓴 것이다.

 

‘진짜 실미도’의 진실을 담은 ‘자넨 하나님이 살렸네’의 저자 양동수는 동 시대를 사는 신앙인으로서 충분히 존경받을만 하다. 그 이유는 그가 그 비극적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난 믿음의 승리와 타인을 배려하는 진한 휴머니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책을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1. 저자는 사건 당일 날,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어린 시절 교회학교에서 배웠던 사자굴 속에서 하나님이 지켜주셨던 다니엘과 타는 불속에서도 하나님이 살려주셨던 다니엘의 친구들의 성경 속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기도했다. 저자는 자신이 드라마틱하게 생존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를 신앙고백으로 체계화 시킨 것이다.

 

2. 여러분은 'The Deer Hunter' 라는 영화를 기억하시는지..... 월남전에 참전한 후 사고로 제대하여 고향에 돌아와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하는 예비역 군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이다. 전쟁을 겪은 군인들은 대개는 전쟁경험 트라우마에 평생 고통을 받는다. 실제로 실미도 사건에서도 기간병 생존자중 한 사람은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의해 일찍 삶을 마감하였다. 그리고 저자 자신도 그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는 서술이 나온다. 그러나 저자는 교회 공동체(아현교회)에서의 주일학교 교사와 농촌 봉사를 통해 ‘덤으로 얻은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했다.

 

3. 우리나라는 60여년 전에 동족상잔이라는 전쟁을 겪었고, 나는 전후에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이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쟁을 경험한 세대보다 경험하지 못한 세대들이 더 많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을 역사적이고 객관적으로 후세대들에게 교육하는 것을 하지 못했다. 군사 정권으로 집권한 자들이 한국전쟁에 대해서 자신들의 체제 선전을 위한 도구로 혹은 전쟁을 경험한 자들의 경험에 의존하여 적(북한)에 대하여 적대감을 극대화할 수 있는 도구로만 이용한 측면이 있다. 이런 것들은 앞으로 국가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이다. 그런데 저자는 ‘실미도’ 사건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문제이며 냉전시대의 산물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고를 일으킨 ‘훈련병’ 들에게도 적대감이 아니라 연민과 사랑을 가지고 대한다. 그리고 훈련병들을 흉악범이나 사형수로 몰고, 국가를 파렴치범처럼 그린 상업주의 영화에 대해서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가지고 있다.

 

4. 저자는 ‘실미도 사건’ 이라는 하나의 역사에 대해서 정치적이든 상업적이든 왜곡시킨 상황에 대해서 그저 분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모든 역량을 가동하여 진실을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프락시스야말로 그가 진정 존경받을 만 한 신앙인의 자세이며 하나님이 그를 살려낸 진짜 목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느 역사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그토록 참혹함에도 불구하고 그치지 않는 것은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는 전쟁의 참혹함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기록이 중요하다.

 

1992년에 유럽의 발칸반도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내전은 종교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인종청소 전쟁이었다. 물론 그 속에는 정치적 동기가 도사리고 있었다. 2년간 계속된 이 전쟁으로 27만명의 사망자와 2백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로스엔젤레스 타임스의 기자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원제 : A Story of War, 미래의 창, 2002 발행)는 20세기 말에 유럽에서 발생한 이 야만을 고발하면서 “이 기록은 전쟁터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실을 전하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이 강대국들의 정책에 영향을 미쳐 결국은 보스니아 사람들을 구하게 된다는 가슴 뿌듯한 해피엔딩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해서든지 진실을 밝히고 알리기 위한 자신의 노력이 간단히 무시되고 결국은 무위로 돌아간 것에 대한 좌절의 기록”임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기록을 남긴 것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사회가 안정되어 있다고 해도 그 안에는 선동가들에 의해 분열될 수 있는 수많은 틈새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피터 마쓰의 이러한 입장은 내가 글쓰기를 하는 입장과 동일하다.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실미도 생존실화 - 자넨 하나님이 살렸네’를 일독해 보실 것을 권해드린다.

 

김명기

(2012.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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