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가 익어 가면 의사의 얼굴이 붉어진다.

정삼열 | 2024.05.09 09:40
간밤에도 또 꿈을 꾸었다. 내가 물에 빠져 죽어 둥둥 떠 있는데 주변엔 알만한 사람들이 많은데 건져낼 생각을 한사람도 안하는 것 같아 무척 섭섭해하는 꿈이었다. 

개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만 허튼 생각이 들어 아직도 복잡한 감정이 내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부끄럽기만 하다.

물에 빠지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내 힘으로 빠져 나와야지 누가 건저 주길 바라는 것은 사치스런 발상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최근 몇년동안 몸부림치며 나를 학대한 것은 이젠 나 혼자의 힘으로 거센 파고를 헤쳐 나가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의식때문이었다. 그래서 은퇴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라고 매일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건다.   

내 또래의 연배는 대부분 정년을 맞이 했다. 이미 정년을 맞이하고 집에서 노는 친구들이 대부분이다. 의사와 동냥아치, 그리고 목사를 빼놓고는 대부분 퇴직을 했다. 나는 치과 의사로 있는 친구에게도 이제 그만 은퇴하라고 종용한다. 요즘 젊고 유능한 의사들이 갈 곳이 없어 전문의가 되고도 개업을 못하는 데, 수전증이 생겨 손을 떨면서도 남의 이빨을 뽑으려 더러운 입속을 들여다 보느냐고 놀려 댄다. 

물론 목회자 동료들에겐 더욱 혹독하다. 타성에 젖은 직업적 목회를 하려면 조기 은퇴하는게 한국교회를 살리는 길이라고 반협박조로 질타한다. 식당에 가보면 비키니 아가씨가 그려진 선정적인 광고가 손님의 눈길을 끄는 데, 술 이름이 <처음처럼>이란다. 처음처럼! 나는 그 광고를 볼 때마다 가슴이 뜨끔하다. 

과연 '처음처럼'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가? 목회자의 정년은 70이 아니다. 신학대학을 졸업할 때의 그 감격이 사라지고 사명이 희미해질 때가 나이 불문하고 은퇴할 때이다. 엘리 제사장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둡고 사리가 분명하지도 않으며 이상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은퇴를 하지 않고 자식들에게 목회를 세습시키려다가 결국 자식들 잃고 의자에서 낙상해서 죽었다.

"이상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은퇴의 시점이다. 공무원은 진전이 없어도 철밥통처럼 정년을 채울 수 있지만 목회자가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면 그 때가 은퇴의 시기이다. 교회에 가서 감동을 받지 못하고 돌아 온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그래서 나는 동기들을 만나면 더 이상 자리 보존하려 하지말고 시골로 내려오라고 종용한다. 시골은 그나마 눈치 안보고 할 일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은 쌀쌀하고 낮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계절의 환절기라 그런지 얼굴이 푸석거린다. 하도 원성이 자자하여 수염을 깍았지만 친한 친구녀석이 유심히 내 모습을 보더니 근래 강경 새우젓처럼 폭삭았다며 팔십이 넘어 보인다고 슬슬 건드린다. 

참 못말릴 인사가 '사돈 넘 말하듯' 외모를 가지고 핀찬하는 데, 아직까진 머리카락도 내가 많고, 기억력도 월등하고 더군다나 손자가 넷이나 되는 데 감히 어디에 비교하느냐며 내가 네놈의 후견인이니 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며 꼬봉노릇을 하라해도 건성으로 듣는다. 녀석은 손자 이야기만 나오면 꼬리를 내린다. 늦게 결혼하여 아직 막내가 미혼이고 결혼한 딸도 아직 소식이 없어 손자만 낳으면 키워줄 거라고 애원하지만 들은척도 안한단다. 

이 녀석을 놀리기 위해 손자들 동영상을 보여주면 한숨을 내쉰다. 이제 막내 손녀딸이 초등학교 3학년이고 큰 손주는 중3이란 소식에 쇼크를 받은 것같다. 마음이 얼마나 허해졌는지 더 이상 놀리면 눈물을 보일까봐 여기에서 멈추었다. 하긴 이 나이에 차이를 따져봐야 오십보 백보가 아닌가. 언제 우리가 이렇게 늙었느냐며 한동안 추억에 잠겼다. 

나일먹으면 추억에 산다고 한다. 물론 추억이 아름답긴 하지만 모든걸 기억하고픈 건 아니다. 때로는 너무 힘든 시기도 있었고, 아픈 기억들이 존재한다. 심리학에서 ‘무드셀라 증후군(Mood Cela Syndrom)’이란게 있다. 과거를 추억하며 늘 아름답고 좋은 기억만 남겨 놓으려는 마음 상태다. 퇴행심리이기도 하다.

현실을 도피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아름다웠던 과거에 갇혀 지내거나 혹은 공상에 빠져들거나. 무엇이 됐든 지금 내가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만큼은 동일하다. 삶이 팍팍할수록, 현실이 답답할수록, '복고'와 '판타지' 장르가 인기를 끄는 것도 결국은 이런 '현실 도피' 심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니 미운정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그리워지는게 사실이고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간 꼭 만나야 할 사람도 있다.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될진 모르지만 그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십자가의 도를 전파했던 사람으로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은게 마음을 짖누룰 때도 있다.

주변의 친구들이 어쩌다 만나면 모든 걸 내려 놓자고 다짐한다. 모두가 부질없는 것들인데 아둥바둥할 필요가 있는가? 사회에서 낙오하면 끝이라는 두려움과 부족한 사회적 안전망에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상대방을 이기는 것만을 경쟁의 최종 목적으로 삼게 만드는 사회에서 약간 비껴 서는 것도 방법중 하나이다.

이 같은 승자독식 사회에서는 능력이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협력하고,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고 창의성을 키우는 일이 어렵게 된다. 목회자 세계도 마찮가지이다. 다른 사람을 아야기할 것도 없이 나도 이웃 교회가 급작스럽게 부흥하는 걸 곱게 보질 못했다. 말은 안했지만 강박관념에 시달렸고, 친구나 동기생들이 앞 서 나가면 내가 뒤쳐진 것에 대하여 열등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동기회에 나가질 않았었다. 

전체가 그런 건 아니지만 눈여겨 보니 큰교회 목사들은 대게 비슷한 교세의 목회자들과 어울리고,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작은교회끼리 친분을 이어간다. 교세가 커지면 레벨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교회가 커지면 자동차부터 바꾸고 친구부터 바꾼다. 서로가 꺼려 한다. 일상 이야기가 교단 정치 이야기로 바뀐다. 당장 먹고 살기 어려운 개척교회 목사에게 교단 정치는 딴나라 이야기다.  

내 동기중 거간(居間)에 능한 사람이 있다. 거간은 생산자와 상인, 상인과 상인, 상인과 소비자, 국내 상인과 외국 상인 사이에서 거래를 알선하고 구문(口文)을 받는 사람을 말하는데 구문이란 거간이나 객주 등의 중간 상인이 수수료로 받는 것을 말하며, 구전(口錢)이라고도 한다. 거간은 물건을 팔고 사는 사람 사이에서 흥정을 붙이는 직업군인데 요즘은 '거간꾼' 이란 말이 부정적으로 쓰인다.

임지를 알선해 주고 거액의 금품을 요구하기도 하고 총회장 선거 땐 거간(居間)을 부려 한 묷 챙기는 일들을 마치 무용담처럼 자랑하는 이런 인물이 총회를 쥐락펴락하는 걸 보고 이 교단은 희망이 없다는 생각을 진즉 부터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전힁을 지적하는 걸 보지 못했고 거간꾼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많은 경쟁의 형태가 '네가 아니면 내가 죽는' 투쟁적 경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현재 한국인이 맞이하고 있는 경쟁은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도 서슴지 않는 단계로까지 나아간 상황이다. 나는 나이들어 가면서 자기 독선과 고집이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암시를 매일하고 있다. 젊어서는 굽힐줄 모르는 교만함과 독선이 있었을테지만 나일먹어서는 가능하면 순진하진 않지만 순수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내 안엔 일곱 색깔 무지개처럼 다양한 감정이 도사리고 있다. 좋은 것만 끄집어 내어 사용하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많다. 오늘 하루 어떤 감정을 나의 주된 감정으로 붙들고 생활했는지에 따라 오늘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불순한 생각을 가졌다면 나를 대하는 사람들도 불순하게 대할 것이다. 모두가 내가 하기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가능하면 단순명료하게 살려고 마음먹었다. 잔머리 굴리면서 요령껏 사는게 꼭 성공의 길이 아니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나보다 머리도 좋고 조건도 좋았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교 아닌 비교를 해보니 별반 차이가 없는 걸 알았다. 돈많다고 꼭 행복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건강하다고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남자들은 인생도 단순하다. 어느 누구도 일만 하며 살도록 태어난 사람은 없다. 사람마다 다양한 욕구와 특성들을 갖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지를 결정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과 내용이 달라진다. 남자는 일과 가정이라는 두 개의 톱니바퀴를 오가며 살아온 그들이다. 교계는 다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순진한 사람이다. 교계라고 차별이 없고, 성골 진골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중형교회, 아니 작은 교회 목회지도 소위 말하는 '빽'이 없으면 주변 둘러리에 불과하다.

내일부턴 본의 아니게 신축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지인이 건축허가를 허락받은 땅인데 사정상 건축을 하지 못할 형편이라 일단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중에 매매하여 정산해주기로 하고 터파기 공사를 시작하려 한다. 이 일이 아니더라도 수주받은 곳이 두군데인데 세개를 장마철이 되기 전까지 마치려면 초인적인 힘을 쏟아 부어야 할 것 같지만 전혀 두렵지는 않다.

그래서 오늘은 텃밭에 머물며 한동안은 등한시할 것 같아 마음먹고 지지대는 물론 잡초를 제거했다. 물집이 잡힐 때까지 일을 하다보니 하루 해가 엄청 짧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내 성격상 새벽 5시에 식물에 물을 주고 퇴근하고도 텃밭으로 달려 가겠지만 이를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토마토가 익어 갈 때쯤 손주들을 불러 들이려고 안간힘을 쓰다보면 피곤은 저만치 물러 간다. 

토마토가 붉어지면 의사의 얼굴이 붉어진다는데 그만큼 건강에 좋은 채소이지만 나는 토마토가 별로이다. 하긴 어떤 과일이라도 선호하는게 없지만 두리안만큼은 댓조각 먹을 정도로 입에 맛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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