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리가 너무도 커보인다

정삼열 | 2024.04.28 10:11
나무와 사람은 넘어져봐야 그 크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나무의 크기를 알아 본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러나 넘어지면 비로서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사람도 곤경에 처해봐야 진정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의 그릇 크기는 이해관계에 있을 때의 처신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판단되고, 거래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그래서 더 이상 볼 일이 없다고 생각될 때 처신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의 그릇 크기를 알 수 있다. 내가 젊었을 땐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아주 없었던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좋은 아버지다는 믿음을 저버려 본적이 없었다. 생전엔 아버지의 크기를 가름하기가 어려웠었는데 요즘은 그 자리가 왜 이리 커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이 아버지 추도식날이기도 하지만 그 빈자리가 너무도 커보인다. "말이 힘이 있는지를 알려면 먼 길을 가봐야 알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시간이 오래 지나봐야 한다." 명심보감 계선편에 나오는 이 말은 백 번 들어도 지당하다. 나와 이해관계가 있을 때 친절하기는 쉽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끝났을 때도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기는 어렵다. 

살다보면 이제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여겨지는 순간이 있다. 그래서 무례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된다. 나 역시 하늘을 향해 쭉뻗은 나무의 크기를 가름하기 어려워 등한시한걸 후회하기도 한다. 

강경을 거쳐 교단 순교지 병촌성결교회를 지나 석성 십자거리에서 직진하면 공주시 이인면이 나온다. 일년에 대여섯번은 지나는 길이지만 그래도 이 길을 지날 땐 많은 상념에 젖는다. 이젠 다 잊은 것 같은데 세월이 한참 지났어도 내 마음 한 구석엔 여전히 잊혀질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송구스럼과 그리움이 교차하며 울적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매년 내가 독단적으로 벌초를 해드리지만 어느새 잡풀이 많이 나 있다. 워낙 충청도 두메산골이라 고라니 멧돼지를 자주 목격한다. 산소를 이장할까 생각도 했지만 본인들이 어릴 때 뛰어 놀던 고향 근처로 가고 싶다고 한 이상 불편해도 거기에 모시는게 나을 것 같아 선영을 공원화했지만 계속 관리하기가 힘들어질 거란 염려가 점점 커진다. 

아마도 내 당대엔 부모를 그리워하며 자주 찾겠지만 손주대로 내려가면 잊혀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오늘도 우리집에서 추도식을 하면서 전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두가지를 제안했다. 첫째는 매년 추도식이나 명절날 오남매만 모일게 아니라 장손을 반드시 참여시키라는 것과 그것마저 어렵다면 화장을 시켜 수목장을 하자고 제안했다.

내가 건축일을 하면서 토목공사 중 최소한 여섯구의 시신을 발견하고 자리를 옮겨 정중히 모신 경험이 있다. 후손이 찾지 않으니 분봉이 사라지고 결국은 밭으로 사용되다가 포크레인에 찍혀 유골이 들어난 경우인데 그 때마다 한 시대를 음미했을 장본인들이었을텐데 어쩌다가 잊혀진 존재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며 씁쓰레한 기분을 느낀 때가 많았다.

그럴바에야 차라리 수목장을 해드리는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 내 집 안으로 모셔오고 나 역시 그 곁에 수목장을 하는게 좋겠다는 생각에 엉뚱한 제안을 하며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2천평 정도의 땅을 구입해 놓았는데 천평 정도에 공원을 만들어 여러 사람 명의로 등기를 내어 한동안은 매매를 못하게 만들어 놓고 후손들이 가끔 찾아와 휴식할 수 패션을 만들테니 수목장을 하자고 제안했다.     

이런 제안을 하는 내 입장이 미묘하지만 시대가 이러니 어쩌겠는가? 요즘 젊은 사람들은 조상 묘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나도 조만간 죽게 될 것이며, 곧 아무도 우리들에 관해 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은 짧은 기억력 밖에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우리들에 대한 기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이며, 묘비에 새겨진 우리 이름도 곧 바람과 비에 씻겨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생전에 갓을 쓰고 하얀 수염이 인상적이었던 할아버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예 방학 땐 충청도 공주에서 살다시피했다. 다락에 감춰 놓은 곶감이며 자연산 꿀을 놋수저로 넘치도록 떠서 입안 가득 넣어주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다른 사람에겐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파격적인 특혜였다. 한학자이셨던 할아버진 아마도 연일 정씨(延日 鄭氏)의 계보를 제일 잘 암송하는게 기특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사랑속에 자란 내가 할아버질 잊은 건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군종사관38기로 육군보병학교에서 훈련받을 때 돌아가셔서 장례식에도 가보질 못했고, 이 후 할아버지 추도식 날짜도 기억하지 못한다. 큰 집이 아니기에 추도식에 가 본 적이 거의 없다. 어쩌다가 어머니 아버지 산소에 갈 때 들르긴 하지만 그것도 시간에 쫓겨 황급히 돌아 올뿐이다.  

9대조 할아버지가 공주목사를 지냈기에 이 일대 탄천면 국동리에 조상을 보시고 200년 전에 정착했지만 나에겐 여전히 낮선 곳이다. 제사나 시제를 드리지 않기에 더욱 그렇다. 아직도 탄천면이나 이인면에 먼 일가 친척들이 살고는 있지만 남이나 다를바가 없을 정도로 왕래가 없다. 먼 조상이 같았을뿐 애경사도 모르고 지나간다. 예전같았으면 한 울타리 안에서 10촌이 나온다고 했지만 이젠 사촌은 고사하고 친 형제간에도 먹고 살기에 바뻐 교류를 하지 않고 있을 정도이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언제부터인지 동정의 대상 혹은 잊혀진 대상이 되어버린 아버지...그 아버지는 나에게 지줏대이셨다. 성품상 별로 말씀은 없었지만 늘 깊은 사색과 고민을 온 몸으로 부딪치며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신 위대한 이름이다. 아버지란 이름때문에 울 장소가 없는 슬픈 이름이다. 병상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손을 꼭쥐고 돌아 가셨다.  

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한없이 눈물만 흘렸지 큰소리로 哭을 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운명하시는 순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이미 심장 박동기는 멈추어 서 버렸지만 아들은 얼음장같은 곳에 아버지를 유기하는 것이 죄스러워 億丈이 무너진듯 꺼이 꺼이 울고 있었다. 남긴 유품이라고는 빚바랜 목사가운 한벌, 고이접어 마지막 가는 길에 덮어 드리며 적삼을 대신하여 그의 싸늘한 몸을 감싸드렸다.  

난 아버지께 수의 대신 목사 가운을 입혀 드렸고 가슴에 평생 사용하시던 심방 가방과 빚바랜 성경책을 놓아 드렸다. 목사 가운은 나이롱이라 안된다는데 난 고집을 피웠다. 목사로, 목사처럼, 목사답게 살다 가셨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너무도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난 그 해 뇌졸증으로 쓸어졌다. 의욕을 상실할 정도였다. 

그리고 조퇴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 기도 하나만큼은 최고였던 부모가 없으니 홀로 설 자신감을 상실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어렸을 땐 어머니만 찾았지만 장성해서는 아버지의 존재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더 크다. 그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효가 결코 작지 않다. 

조상님들 산소가 즐비한 곳에 서면 언젠간 나도 잊혀질 존재라는 걸 실감한다. 모두가 파란만장한 세월을 사셨겠지만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인간은 결국 잊혀질 존재이다. 자신이 한평생 치열하게 살았던 흔적들을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어느날 갑짜기 그렇게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 그만큼 후회가 많다는 말일게다. 

난 부모님이 생각날 땐 말없이 충청도 공주에 있는 선영에 다녀 오곤 했다. 이젠 한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다녀 올 수 있는 곳에 자릴 잡았기에 그나마 다행이지만 ‘불효부모사후회(不孝父母死後悔)'이니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섬기기를 다하여라’는 옛 어른들의 말씀을 왜 실천하지 못했나 후회스러울 때가 많다.   

그 분은 가능하면 적을 만들지 않고 사셨으며 목회의 현장으로 떠나는 나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절대 교인을 이기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절보고 떠나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당신은 무능해서 한 교회에서 40년 이상을 목회했지만 나에게는 교회가 원치 않는 것 같으면 싸워서 이길 생각말고 미리 짐을 싸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친의 말뜻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인간관계를 잘 맺으라는 교훈으로 받아 들였다.인간관계야말로 사람이 살아가는데 최선의 덕목이다. 다시는 이 우물을 먹지 않겠다고 침을 뱉어도 갈증이 나면 어쩔 수 없이 우물을 찾게되는게 인간사이다. 그러니 누굴 탓하고 원망할 필요가 없다.또한 생전 보지 않을 것처럼 안면몰수하는 것도 어리석은 행위이다. 사람 인(人) 자(字)는 서로 지렛대 역할을 해야지 혼자 독불장군처럼 살면 결국 넘어지게 된다. 

형제들이 모두 떠나고 오늘 밤부터 내일까지 비가 온다는데도 텃밭에 물을 주며 이런 저런 상념에 사로잡혀 지난 추억의 장면을 떠올리며 우울모드에 빠져 들었다. 생각해 보니 본인들이 뛰놀던 그 산야에 잠들길 그렇게 소원했는데 내 편의를 생각하며 수목장 운운한게 죄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내 당대가 끝나 설령 잊혀진다 하더라도 그 건 남겨진 후손들이 할 일이지 내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 제안을 취소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둠이 몰려오면서 짙은 구름이 하늘 가득할 걸 보며 비를 머금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비라도 한바탕 내렸으면 좋을듯 싶다. 이미 맷돌 호박을 심었는데 이웃에서 포트에 키웠다며 한판을 가져다 주는데 워낙 빈공간이 많아 곳곳에 심었지만 이것들이 모두 자라면 호박장사를 나가야 할 판이다. 일단 나중엔 어떻게 되더라도 잘 키워 지인과 교인들에게 몇통씩 나눠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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